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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엄마! 나 있잖아

우리집 사람들은 맘속에 있는 말을 꺼내는 타입이 아니다. 유독 가족끼리는 더하다. 엄마가 가끔 늦은밤에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거나, 동생이 굳이 연애가 아니라도 밤늦도록 전화기를 들고있는 일이 많은걸 봐서는 어딘가에 자신만의 대나무숲이 있는거겠지.

가정에서 길러진 성향인지, 내 자신의 성향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들 이야기는 많이 들어주는 편인데, 정작 고민이 있으면 나는 그걸 혼자 끌어안고 끙끙한다. 감히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옆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웬만해서는 혼자 묻어두고, 하다하다 죽을것 같으면 겨우 내 편-얼마나 고맙고 근사한 표현인지!-에게 말을 꺼낸다. (나의 최측근이라 할 수있는 몇몇 감사한 존재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인간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안고 썩어갔을 것이야.)

아무튼 '가족에게 내 고민따위를 털어놓고 이해와 위로를 받는다'는 생각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한살터울의 동생과도 이상하게 '고민'만큼은 대화에서 꺼내면 안될 금기와도 같은 영역. 누가 그렇게 정한것도 아닌데, 가족 중 한명은 '내가 지금 이러이러해' 하고 허심탄회하게 까맣게 탄 속마음을 토로할법도 한데 그 누구도 살면서 단 한번도 그러지 않았다. 나도 으레 그랬다. 간혹 모여앉아 밥을 먹다가 너무 힘든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으면 입술을 깨물고 방으로 달려들어갔고, 내 동생도 정말 힘들었을 얼마간의 시기를 견디다 견디다 나에게 쥐어짜듯 한마디 했다. '누나. 오늘 술 좀 같이 마셔줘.' 맞은편에 날 앉혀놓고는 말없이 담배 한갑을 다 피웠지 싶다.

그러니까. 가족에게 위로받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도 없고, 해볼수조차 없는 나였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밖에서 돌아오니 엄마가 거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눈인사를 한 후 방으로 들어가다 전화를 받고 있는 엄마의 등에대고 나직히 말했다. 나도 모르게. '엄마. 나 처참해.'

가족 중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다니!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그리고 내 입에서 튀어나온 '처참'이라는 단어가 눈물나게 불쌍해서 내 방으로 슥 들어와버렸다. 그리고 계속 중얼거려보았다. '엄마 나 처참해. 엄마 나 처참해. 엄마 나 처참해.' 피식.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내 이야기를 해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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