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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사랑의 상황

△ 임경선 <자유로울 것>

 

 

내가 종종 끄적이기도 했는데 나는 시간을 묵힌 것들에 대한 환상과 동경이 있다. 오랜 시간을 지나온 것들. 시간을 관통하면서 알맞게 다듬어진 어떤 것들. 나에겐 감정도 그 중의 하나라서 늘 '오래'하는 연애를 꿈꿨더랬다만, 내 마음이 너무 어리기도 했고 여러가지 것들이 늘 비껴나가서 오래하는 연애가 잘 안됐다. 품어 보지 못한 것은 늘 더 크게 보이는 법. 그래서 난 연애를 오래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눈이 막 하트 뿅뿅이 되어서는 '너무 좋겠어요!' 한다. 정작 상대방들은 권태로움을 토로하거나, 별스러운 일도 아닌데 왜 그러냐는 투로 반문했지만.

 

1월 초에 베트남으로 놀러갔을 때, 동갑의 - 나이를 듣고 나서 깜짝 놀랐지만 - 남자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아내와 5년을 연애한 뒤 결혼했다고 했다. '우와! 첫사랑이랑 결혼한거예요?' 라고 물었더니 발칵 화를 내면서 '무슨 스무살이세요?' 라고 대꾸하는 게 아닌가. 지금의 아내가 첫사랑이면 안되는건가. 첫사랑이랑 결혼을 못해서 화가 난 건가. 첫사랑과 결혼하는 것이랑 스무살이랑 대관절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 주변에는 첫사랑과 결혼해서 잘 사는 커플들도 있는걸. 내 첫사랑이 누군지 진짜 꿈에도 기억 안나는게 좀 슬프긴 하지만. (정확히는 첫사랑이라는게 '처음 사귄' 사람인건지, '처음 좋아한' 사람인건지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서 그렇다. 나는 첫사랑을 후자의 정의로 해석하는데, 내가 도무지 처음 누구를 좋아했는지를 모르겠어서 첫사랑을 모르겠다.)

 

연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오늘 게으름을 떨치고 화장도 곱게하고 광화문 교보에 갔다. 남자와 사랑과 남자와의 사랑에 대해서 주구장창 이야기하는 임경선 작가의 신작이 궁금해서 - 아, 그래서 저는 그녀를 좋아합니다 - 들춰봤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계속 쓰는 삶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앉아서 책을 좀 훑어보고 싶어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매장 안을 빙빙 돌다가 겨우 자리가 나서 앉으니 10분도 채 못 보고 나왔다. 책은 역시 비행기 안에서 보는게 제맛이다.

 

원고를 정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회사 다니면서 '시간만 생기면 꼭!' 이라고 핑계를 대고 또 댔으니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글들을 들추어 보게 된다. 너무 유치해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끈거리다 못해 배가 막 아프다. 너무 부끄러워서. 그런데도 계속 봐야해서. 그리고 당연히 사랑할 때의 내 모습과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담은 글들도 다시 보게 된다. 어떤 글들은 아무렇지도 않고, 어떤 글들은 아직도 마음이 아픈데 이게 꼭 시간의 수순이라기 보다는 그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이 꼭 좋아하는 마음만 있는건 아니잖은가. 좋아하는 동시에 상대에게 짜증도 나고 화가 나는 것처럼, 헤어지고 나서 누군가를 반추하는 마음에도 오롯이 그립다, 라는 마음보다는 아직까지 화가 남아 있다거나... 뭐 그런 것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물론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 오히려 나의 그런 면이 더 차고 넘칠지도.)

 

이틀 전 극장에서 본 <언어의 정원>이 너무 좋아서, 평소 일본 문화에 대해 빠삭한 이에게 보았느냐고 물어봤더니 딱 잘라 사제지간 사랑이라 안 본다고 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니가 하면 불륜'의 입장이 아니고, 그 애니메이션을 보면 진짜로 서로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감정은 마음에 물이 드는거다. 그 사람 물이 드는거다. 비오는 날, 옷에 빗물이 스미는 것처럼 그렇게. 어떻게 그 상황에서 사랑을 안 하나. 그건 그냥 말로 표현하고 안 하고의 차이일 뿐이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사랑할 수 밖에 없었을거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면 사랑할 수 밖에 없었을거다.

 

방금 쓴 이 한문장을 놓고 들여다본다. 그 상황이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건 맞는데, 상황 자체를 만들어 간 이들은 두 주인공이니까. 그들이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비 오는 날마다 우산을 쓰고 신발을 다 적셔가면서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서 서로를 기다리는 '상황'을 만든거니까. 상황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다. 일이 되어가는 과정이나 형편.

 

오늘 잠깐 읽은 임경선 작가의 신간에서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 사랑은 빠지는 거지만 빠지고 나서 할지 말지는 본인이 결정하는 거라고. 끄덕끄덕. 삶에 대한 테두리가 넓어질수록 한정적인 의미에서 정의하던 낱말들이 얼마나 숱한, 숨겨진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된다. 엄마라는 말도 그랬다. 이미 엄마이지만 엄마 자격을 박탈당한 이도 있었고, 엄마이면서 엄마를 거부한 엄마도 있었으며, 엄마였다가 엄마가 아니게 된 이도 있었다. 사랑도 그렇겠지. 누군가와 오래 만나는 것에 대한 환상과 동경이 있는 이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함께 익혀 나가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둘이서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인구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존재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그걸 꼭 짚어서 '사제시간 불륜' 이라던가 -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 어쩌고 저쩌고의 정형화된 낱말에 집어넣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 듯 싶다.

 

이전에 써온 원고를 들추다가 하도 연애에 대해서 구구절절 써놓은 것들이 많아서, 읽으면서 맘이 아프기도 하고 간간이 슬쩍 웃기도 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랑을 해왔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것이 1:1의 관계이고 전적으로 두 사람이 뭔가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도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왔겠지, 라고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그 과정과정마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기만을 바래볼 뿐.

 

여든이 되어도 두근두근 로맨스 중이면 좋겠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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