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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마실/비오는 꿈의 리장

운남성으로 : 잊지 않기 위한 기록들

 

 

나는 대부분의 모든 것을 책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한글을 엄마한테 맞아가며 네살때 뗀 뒤로는 책을 무척 사랑하게 되었고, 이것이 꽤 오래 갔습니다. 2년전 TV에서 리장의 객잔을 보았는데, 다시 우연히 어느 책에서 리장의 풍경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여기를 가야겠다. 잊지 않고 있다가 내가 일을 해서 번 돈과 휴가라는 시간을 데리고 잊지 않고 있던 리장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장면 1.

 

운남성이 어디 붙은 성인지는 몰랐습니다. 우리 딸이 중국어를 전공한다며, 지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한쪽 벽면의 반을 잡아먹을 정도로 큼지막한 중국 지도를 붙여둔 내 방. 고향집에 내려온 오늘에야 들여다보곤 '이렇게 먼 곳에 다녀왔구나.' 새삼 실감합니다. 여기서 여기는 밤기차를 탔었지, 여기서 여기는 다시 버스를 탔고... 지도를 따라 손가락을 대봅니다.

 

여차여차해서 쿤밍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 다시 버스를 잡아타고 한 시간을 달려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기차역 근처에서 버스가 섰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호객꾼들이 달려들지만 상대하지 않고, 앞뒤로 맨 가방을 꼭 챙기고 캐리어를 끌고 우산을 꺼내 씁니다. 온통 붉은 거리의 간판 불빛이 바닥까지 번집니다. 친구가 예약해둔 기차표를 찾을 수 있을련가. 이 표를 찾을 수 없다면 다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야할텐데, 숙소는 찾을 수 있을까. 피로감과 불안이 뒤섞인 여러가지를 캐리어와 함께 끌고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일단 여권번호로 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자동기기 앞에서서 어물쩍 거리는데 내 뒤에 기다리는 엄마와 딸이 있어 먼저 쓰라고 눈짓을 했습니다.

- 저... 저는 한국인인데요, 친구가 표를 예매해두었다고 하는데, 혹시 친구한테 전화 한 통만 해줄 수 있으세요?

왠지 무척이나 선한 눈빛의 아주머니가 흔쾌히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습니다. 친구도 예약만 해두었지 표를 찾는 방법은 잘 모르는 상태. 다시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누군가에게 물어 기계에선 여권으로 표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역 안의 개찰구로 함께 뛰어 들어갔어요. 아주머니의 표도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상태였고, 내 표는 겨우 10분도 안 남은 상태여서 급했습니다.

 

나를 걱정한 아주머니가 표를 찾는 개찰구까지 함께 가주었고, '예약표...'라고 중얼거리는 내게 '예약표 뭐? 찾을꺼야, 예약할꺼야? 뭐?' 라고 퉁명스레 쏘아붙이는 개찰구 직원에게 '찾는다고!' 하면서 나를 도와 말해주었습니다. 아주머니도 표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4번 개찰구로 가면 돼! 4번!' 이라고 몇 번이나 내게 당부하고는 사라졌는데, 열차 시간이 얼마 안남아 당황하는 나를 걱정했는지 다시 다급히 나를 찾아와 4번 출구 앞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달렸습니다. 너무 급해서 제대로 고맙다고 인사도 하지 못하고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리 뛰기 바빴습니다. 천사. 천사일꺼라고 생각하면서. 

 

장면 2. 

 

쿤밍에서 리장까지는 아홉시간이 걸립니다. 친구가 예약해둔 표는 침대표. 내 자리를 찾아 갔더니 다른 남성이 있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자리 좀 바꾸자. 내 맞은 편이 내 친구거든.' 

내가 바꾼 칸은 아빠. 엄마, 아들이 여행을 하느라 나란히 침대를 쓰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다 쓰진 못했지만 나를 무사히 리장까지 갈 수 있게 해준 여러 도움들이 너무 고마워 침대에 앉아 얼굴을 감싸쥐고 훌쩍이기 시작했고, 중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아들은 갑자기 우는 어떤 여자를 보고 놀랜 표정이었습니다. 실컷 울고 나서 그 애를 불러

- 저 내 친구한테 문자 한 통만 보내줄 수 있니?

라고 문자를 부탁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엄마 아빠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가족들이 거닌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구경했고, 내가 갑자기 운 이유를 물었습니다. 내가 세수를 하러 기차의 세면실로 갔을 때는 문득 나를 따라와 기념 사진을 찍자고 해 얼떨결에 기념 사진도 한 장 찍었습니다.

나는 조금 자고 일어나 앉아 기타 음악을 들으면서 날이 밝아오는 리장의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곳. 새벽 다섯시쯤 그 가족들이 먼저 내렸고,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어주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장면 3.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십년도 넘게 마음 속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습니다. 나무로 된 집에서 내다보는 비내리는 초록색 정원. 한번도 가본적 없는데 줄곧 내 마음에 자리하는 이 풍경에 대해서 스승님께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스승님은 '마음의 성소'라 답했습니다. 리장에 도착해 비오는 날 아침을 가만히 내다보았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꿈에 보던 그곳임을 알았습니다.  

 

장면 4.

 

같은 숙소를 쓰던 중국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숙소를 나오는 길. 톡톡. 통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모두가 나를 향해 방긋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아, 그 순간 마음이 분명히 덜컥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장면 5.

 

다른 도시로 이동해 운좋게 침대 두 개 있는 방을 혼자 쓰게 되었습니다. 짐을 푸는데 문 입구에 작은 남자아이가 '들어가도 되요?' 나를 향해 묻습니다. '그럼, 들어와!'

엄마 아빠와 여행을 하고 있고 오늘이 생일이라고 했습니다.

- 와, 생일 케이크 먹었어?

- 아직

- 저녁에 먹겠네?

- 아마?

- 누나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생일 축하해줄게! 몇 살이야?

- 아홉.. 아니 열살! 점심 때 지났으니까 이제 열살이야. 나는 정오에 태어났거든.

- 열살 축하해!

 

작은 아이가 어찌나 살가운지 나를 도와서 몇 번이나 문단속을 도와주고, 나를 끌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누나, 저기가 얼하이 호수예요, 왜 얼하이 호수인지 알아요? 귀 모양을 닮아서 그래요.' 호수를 보며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왠일인지 옥상 땡볕아래 아이와 사진 한장을 딱 찍었는데, 저녁에 돌아오니 아이가 떠나고 없었습니다. 맛있는걸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작은 선물이라도 주려고 했는데. 열살 생일에 반짝 만난 누나를 기억하려나.

 

장면 6.

 

별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분명히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별이 너무 많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면 나는 좀 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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