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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금세 사랑에 빠지는


친구들이 금사빠 라고 자주 놀렸다. 툭, 하면 사랑에 빠졌으니까. 그때는 금사빠라는 별명이 부끄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복받은 심미안이다. 단숨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마법같은 능력이니까.

1초만에 사랑에 빠져놓고 2년을 넘게 허우적거리기도 해봤고, 금세 사랑에 빠진 내 눈동자를 알아본 상대방이 내 손을 잡아준 행운도 있었다. 그대가 어찌 모르겠는가. 좋아하는 것을 바라볼 때면 숨기지 못하고 유난히 반짝거리는 내 눈동자를.

며칠전 어느 글에서 '누군가를 진짜 진짜 좋아하게 되는건 기적이라고, 그냥 기적인거' 라는 문장을 읽었다. 그래, 말 그대로 그건 기적인거다. 살면서 누군가를 진짜 진짜 좋아하는 마음은 좀처럼 쉽게 오진 않는거니까. 나도 다행히 기적을 몇 번 만났지만 지금 손에 거머쥔 기적은 없다. 내가 다 흘려버렸다. 기적은 기적 다워야한다고 생각했고 굳게 믿었다. 흠없이 반짝이고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내가 좋아한 상대의 흠이 보이면 정말로 실망했다. 그 흠을 크게 파고든건 나다. 삶의 파도에 자주 흔들리는 남자를 만나면서는 '어쩜 남자가 저렇게 목표의식이 없을까' 실망했고, 오로지 목표 밖에 없는 남자를 만나면서는 '저 인간은 사랑도 수치화 할 수 있을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고개 저을 이유는 늘 있었다. 기적이란 더 반짝이고, 더 근사하고, 더 황홀한 것일테니 미련없이 흘려보냈다. 안녕.

나는 내 그림자를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상대방의 그림자도 인정할 줄 몰랐고, 상대에게 드리운 작은 그림자를 걷어내려 애썼다. 내 사람은 그림자가 있으면 안되는 사람인데, 온통 밝고 황홀하고 반짝거려야만 하는데, 하고.

그림자를 인정할 줄 모르는 내게, 나의 오래된 스승이 '내 그림자가 여기 있구나' 인정하는 연습을 하라했다. 겉으론 끄덕거려도 그 말이 무슨 말인줄 몰랐다. 오로지 그림자를 빨리 없애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그래, 내 그림자가 여기 있구나! 오, 그래. 내 그림자가 여기 있구나!

몇년이나 그림자를 쫓아 다녔다. 그래도 그림자는 거기있었다. 서럽고 속상해서 목놓아 울었다. 스승이여, 제 그림자는 왜 안 없어집니까? 스승이 답했다.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그림자를 인정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를 사랑한 이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반짝거린다, 라는 말을 했다. 나는 내가 온통 밝고 황홀하고 반짝거려서 그런줄로만 알았다. 혹여 그림자가 들킬까 꽁꽁 싸매려 애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내 짙은 그림자와 딱 붙어있는 나를 봐준 것이다. 한여름의 태양빛 아래 그림자가 유독 진한 것처럼, 내 짙은 그림자에 시선을 둘 수도 있지만 그림자 바로 곁의 반짝이는 나를 봐준 것이다.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나는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티없이 반짝거리는 줄로만 알아서 내 눈에 들어오는 상대의 빛과 그림자 중에 줄곧 그림자에만 시선을 던졌다. 왜 너는 이렇게 어둡고 추운거냐고, 도무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를 벗어나 다시금 예쁘게 반짝이는 상대를 볼때면 깜짝 놀랐다. 마치 내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그 모습처럼 아름답고 근사해서. 그림자를 도려내려 애쓴 나말고, 그림자까지 품어주는 누군가의 곁에서 그들은 다시 근사해졌다.

누군가를 진짜진짜 좋아할 수 있다는 건 말 그대로  기적이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두 점이 만나 선 하나를 가진다. 실로 놀라운 확률이지 않는가. 그냥 만나지는 사람은 없다. 나 꽤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않고 있다. 짧은 내 삶을 통틀어서 이렇게 오래 연애를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알아가고 있다. 어느 누굴 갖다줘도 그림자 밖에 보지 않았을테니까, 자기 그림자조차 잘라내려 안간힘을 쓰는 애니까, 그림자의 존재조차 싫어서 발버둥치는 애니까.

우리 모두는 별처럼 반짝거린다. 그래서 저마다의 그림자를 안는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곁의 별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려한다. 별을 사랑하려면 그림자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머리로 겨우 알았다.

별처럼, 눈송이처럼 내 곁에서 반짝일 당신을 기다리며.

내 어깨에 닿을듯 근사한 달이 걸린 3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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