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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이후

어제 '룸' 이라는 영화를 봤다. 한 여자가 작은 창고에 7년간 감금 되었다가 탈출한 이야기가 소재인데, 탈출 그 이후를 밀도있게 그리고 있어서 좋았다. 국내 영화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전개도랄까.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결말'에 포커싱 되어있다. 결말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않는다. 어떤 수를 써서든 목적을 이루면, 목적을 이룬 다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찌됐든 행복하겠지 라는 암묵적인 국민적 동의가 있다. 행복의 형태에 대한 스케치도 다들 비슷하다. 좋은 학교, 좋은 회사, 높은 연봉, 능력있는 혹은 아름다운 배우자, 좋은 집... 그래서 다들 힘들어도 잘 참는다.  힘들게 이룬 목표일수록 거머쥔 뒤의 행복감이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주 옛날,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쥔 뒤 맛본 허무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최근 개봉한 '검사외전'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됐는데, 그가 어떤 기지를 동원해 옥살이에서 탈출했는가만 판타지적으로 그려냈지 옥살이 이후의 삶은 궁금해할 가치조차 없다. 행복일테니까. 영화 엔딩도 주인공이 감옥에서 나와 씩 웃는 것으로 끝난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 구태여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두려운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고 결과값에 미리 '행복'이란 고정 함수를 박아버렸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시간과 희생이 뒤따르기만 하면, 더 때려붓기만 하면 무조건 행복해진다. 행복하지 않은 삶은 이 공식에선 용납이 안된다. 예외값은 없다.

몇해 전에 지인이 추천해 준 영화 한 편은 '가정까지 버리고 이상형의 남자에게로 떠난 여자'가 소재다. 우리나라였다면 여자가 가정을 버리기까지의 험난한 과정과 - 이마저도 여자 내면의 갈등보다는 관계를 둘러싼 너저분하고 요란벅적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테지만. 예를 들면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자주 등장해 주인공에게 물을 뿌리고 뺨을 때리고 욕을 퍼부을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상형의 남자 품에 안긴 여자의 알콩달콩 행복한 엔딩이 끝이었을거다. 그러나 영화는 이상형의 남자와 불꽃같던 잠깐의 사랑, 그 이후를 덤덤하게 그린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채워지지않던 허무한 공백이, 그 공백을 말끔히 메워줄 것 같던 이상형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인간 본연의 외로움과 사랑 그 자체가 품고있는 헛헛한 맛과 주인공 및 주변인들의 심리 등 이런저런 요소들을 섬세하고 덤덤하게 잘 그려냈다.

얼마전 한 개그 프로그램 방청을 갔다왔다. 배우들은 열심이었지만 대체로 지루했고 진부했다. 과장된 액션과 자극적인 소재를 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세련된 주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제는 하나인데 이걸두고 매회 다른 방식으로 웃기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정치 이야기도 안되고, 무엇도 안되고, 무엇도 안되고...

'룸'의 주인공은 7년간 그토록 그리고 바라던 집에 와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집에만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많은 것들이 그녀를 괴롭게 한다. 자신이 버렸다고 생각하는 세월, 자기없이도 잘 살아온 듯한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 자식에 대한 죄책감...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결말 이후'의 삶이 그녀를 괴롭힌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는데 어찌 사고방식은 삼면이 꽉 막힌 것 같다. 아무도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행복을 위해 달려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당신이 말하는 행복이 과연 진짜 행복의 얼굴인지 한번쯤 의심해보아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에 대해 다들 침묵한다. 왜냐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너무 아픈거니까. 아픈건 나쁜거니까. 이 나라에서는.

난 허무주의자도, 비관론자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는 '무참한' 결말 하나를 위해 모든 사람들을 내몬다.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것과 생각조차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오히려 결말 그 후를 미리 내다본 사람일거다. 거대하게 드리운 장막 뒤에 사실 그리 큰게 있는건 아니라는 사실을 본 사람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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