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만들어본 고구마 찐빵?
* 토요일 아침. 왠지 합리적으로 느적거리게 된다. 이름모를 모든 이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폭 덮어쓰고 느적느적 뉘릿뉘릿.
* 어렸을 때 동화를 참 많이 좋아했다. 꼬맹이 시절에도 나름의 매니악한 구석이 있어서 다들 읽는 동화 말고, 외국의 희한한 동화들만 골라 읽었는데 트롤과 염소 발톱과 늑대 눈알이 나오는 저 먼나라의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특히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한 부부의 이야기인데, 그렇게 옛날에 읽었으면서도 어찌 아직까지 또렷한지. 이미 나의 운명을 직감했던 것인가. 아 이것은 정녕 운명의 데스티니?
부부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두 부부는 너무 게을러 설거지 하기를 싫어했다. 집안의 그릇을 다 쓴 다음에는 이웃에 그릇을 빌리러 다녔다. 이웃에도 그릇을 하도 많이 빌리러 다녀서 집안이 전부 씻지 않은 그릇들로 가득찼다. 커다란 책장을 가득 압도하는 접시 더미는 아직 손에 물도 안 묻혀본 꼬맹이의 가슴도 짓누르기에 충분했는데, 그 탁월한 자발적 조기교육 덕분인지 늘 설거지와 빨래는 좀 나에게 고역이고 난제다.
집을 늘 단정하게 유지하고,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두려고 병적으로 노력하는 편인데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내가 어떤 꼴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고난 접시도 바로바로 설거지하지 않으면 어느새 집안의 모든 그릇을 다 꺼내쓰고 싱크대에 수북히 쌓아두기 일쑤. 오늘 아침은 차마 더이상 모른척 할 수 없어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 고무장갑을 꼈다가 뺐다가 꼈다가 뺏다가를 반복 - 겨우 설거지를 마쳤다. 설거지의 어원을 생각하면서. 설거지는 거지같아서 설거지야! 속으로 부르짖으면서. 빨래와 설거지에 툭하면 굴복당하고 무릎을 꿇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읊조리고 마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 하나 있는데 옷이 1회용이었으면 좋겠다는 사실. 아무리 아름다운 옷도 한번만 딱 입을테니까, 가지고 싶다는 엄두조차 안 낼테니까 그냥 다 1회용이어라. 제발. 시대의 레전드물 <모래요정 바람돌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바로 하얀 천쪼가리만 걸치면 입고 싶은 어떤 옷으로든 변신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여자애는 아마 웨딩드레스 같은 걸 입고 싶다고 해서 입었던 거 같은데, 얘야 너 그거 입으면 평생 빨래 설거지 담당이다. 아무튼 어릴때 접했던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유독 빨래와 설거지, 옷감에 집착하고 부담을 느껴왔던 걸 보면 내가 정말 빨래와 설거지를 힘들어하긴 힘들어 하나보다.
TIP. 설거지와 빨래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그간의 노력들
1. 밥을 비롯한 모든 반찬은 부페식으로 접시 하나에 딱 담는다.
: 집에서 가족들과 어울려 살 때도 나는 유독 이렇게 했는데, 접시에 모든 걸 담으면 일단 설거지 하기가 쉽다. 오목한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손목 스냅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
2. 식사 대신 과일, 간식으로 대체한다.
: 과자를 좋아한다. 과자를 좋아해서 밥을 안 먹기 시작한건지, 밥 먹고 설거지하기 싫어서 과자를 좋아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대한 설거지가 필요없는 형태로 영양소를 흡수한다.
3. 밖에서 사 먹거나 친구집 가서 먹는다.
: 밖에서 사 먹는것은 지불하는 페이에 설거지에 대한 수고료도 있으니 상관없다만, 친구집 가서 얻어먹을 경우에는 예의상이라도 설거지를 내가 하는 편이다. 간혹 '에이 냅둬. 뭘 설거지까지 해.' 라며 예의차리는 친구가 있는데, 나는 진담인 척 알아듣고 누워버린다. 오 땡큐.
4. 짧게, 얇게 입는다.
: 여름에는 무조건 원피스만 입는다. 사람들은 내가 원피스를 좋아해서 입는 줄 알지만, 빨랫감을 여럿 만들기 싫다는 이유가 가장 첫 번째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을 바에는 원피스를 입으면 얼마나 편한가! 그리고 그냥 반바지나 치마보다는 얇고 길이감이 짧은 반바지가 더 잘 마른다.
5. 안 나간다
: 나가면 무조건 빨래를 만들게 되있다. 최소한 양말이라도 만들게 되있다. 한 번에 몰아서 나간다. 하루에 약속을 우당탕 몇 건을 몰아서 잡는다.
6. 남동생이라 애석하다
: 한살터울의 동생이 있으나 남동생이라 애석하다. 옷 취향도 사이즈도 모두 다르다. 동생은 키가 180. 여동생이라면 몰래 입고 홱 던져놓으면 될텐데.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내가 안겨줄 수 있는 건 죽음뿐이겠지. 훗.
7. 내 빨래만 한다
합리적 개인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식 집단사회의 부작용을 일찌감치 간파한 나는, 공동체 생활 속에서 나만의 고상한(?) 취향을 지키고 싶어 했는데 - 이를 두고 나머지 가족들은 나를 '싸가지' 라고 불러왔으니- 나만의 세제, 나만의 수건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내 빨래만 내가 사수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어쩌랴. 나머지 가족들의 빨래는 엄마가 다 도맡아 해야하니 그 꼴은 또 못보겠으니 결국 다 내 차지.
* 어제 친구 부부와 통화를 했는데, 친구의 가장 큰 난제는 역시 가사일. 집에서는 정말로 설거지 한 번 안하고 컸단다. 너 그렇게 고상한 애인줄 몰랐어. 그러다가 결혼해서 자꾸 설거지와 빨래를 하게 되니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란다. 다른 부부들처럼 각자의 고유영역을 정해서 지키라고 했더니, 그도 잘 안되는 것이 남편은 매일 야근하고 늦게 오고 자기는 공무원이라 일찍 퇴근하니 야근한 사람에게 설거지 해라, 빨래 해라 종용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어쨌든 결혼 전엔 한번도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던 일들이 결혼 후에 응당한 자기 몫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야속하고 힘들단다. 이 짓을 평생해야하다니! 라고 술이 취해 꼬부랑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친구 남편이 '내가 많이 도와 주잖아!!' 라고 역시 꼬부랑 목소리로 소리지른다. 이 부부가 이구동성으로 나에게 하는 말. '우리집에 놀러와서 밥도 하고 빨래도 좀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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