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말할 때마다 아직도 술냄새나.
그래요? 새벽까지 마셨더니.
왜 마셨어.
속상해서요. 속상할 때 술도 못마신다니 그것도 속상하네요.
왜 술로 풀려고 해. 난 속상할 때 혼자 영화도 보고 산책도 하고 그러는데.
... (영화용 속상함도 따로, 산책용 속상함도 따로, 알코올용 속상함도 따로 있는데.나는)
*
금요일 밤, 초대권이 생겨서 공연을 보러갔다.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저마다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 취향의 곡들은 하나도 없어서 다들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운데 나만 우뚝, 꼿꼿하게 서있었다. 어쨌든 기타 한대에 몸을 묶고 그 순간이 최대인 것처럼 서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그 절박함이 좋았다. 어느 존재에 무엇 하나를 뺏으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나는 저 자리에 펜文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걸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봤다.
얼어붙게 추웠다. 너무 추우니 소주를 마셔야겠다는 일행의 말에 술집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편하게 마셔야하므로 골목 몇 군데를 뒤지며 이런저런 술집을 찾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맞은편 테이블에는 젊은 여자 하나와 늙은 뚱뚱보 외국인 하나, 옆 테이블에는 썸타는 젊은 여자와 남자. 작은 공간이라 대화가 들려왔는데 홍상수스럽구만, 이라는 생각을 절로했다. 뭐 우리 테이블이라고 별다른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들 홍상수영화의 엑스트라 같았다. 시시껄렁하고 시덥잖고 결국엔 남자여자밖에 없는 뭐 그렇고 그런.
나는 소주를 못하니까 추워죽겠는데 맥주를 두병이나 마시고는 거하게 취했다. 덜덜덜 떨면서 마시는데 마실수록 추웠다. 자정을 넘겨 새벽 1시, 2시까지 있었나. 그러고보니 공연가기전에 막걸리도 마셨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또 싸락싸락 내리고 있었다. 제기럴. 대취해서 집에 들어와 씻으려고 하다가 잠이 들었나보다. 불이 다 켜진채로 몸은 이상하게 침대에 걸쳐져 있었다. 아 머리야. 취소할 수 없는 약속이라 몸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온몸이 비틀거려서 넘어졌다. 어흐. 원래의 계획은 책방에서 책을 사고 약속에 갔다가 책을 좀 읽어야겠다는 계획이었건만. 시간에 쫓겨 비틀거리면서 집밖을 뛰쳐나갔다. 어느새 눈이 녹아 비처럼 흐물거렸다.
마흔을 좀 넘긴 언니 한 분을 만났다. 술을 먹어서 정신이 반쯤 몽롱하다 고백을 했더니 말할 때마다 아직도 술냄새가 풀풀 난다며 하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마셨냐고 한소리 들었다. 술로 풀지 말라고. 그러게요. 그렇게 모든걸 술로 풀려는 아버지가 밉고 싫어죽겠더니.
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책방에 들러서 책을 살 요량으로 버스를 탔다. 본격적으로 메슥거린다. 외국인 남자 두 명이 타더니 버스 안을 꽉 채우면서 떠들었다. 뤄브. LOVE. 알아들을 수 없는 남자 둘의 대화중에 러브라는 말이 들렸다. 아마 뭐 맥도날드를 존나게 좋아한다, 이런 거였는데 러브의 원어민 발음이 좋아서 가만히 따라해봤다. 곧이어 '유남생'이라는 말도 들려와서 피식 웃었다. 유남생이 무슨 말이더라. 유노우왓아임세잉. 메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고 유노우왓이임세잉을 아주 빨리 중얼거려서 유남생을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써봤다. 유노우왓아임세잉. 유노우왓아임세잉. 잘안된다. 내릴 곳을 지나쳤다. 메슥거림이 심해져서 집으로 빨리 가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겨우겨우 건물 입구에 들어섰는데 마치 임산부처럼 건물에 가득찬 퀴퀴한 공기냄새에 속이 뒤틀릴 지경. 아니 이 건물에 이렇게 텁텁한 냄새가 났었나? 관리인 아주머니가 한번씩 복도 청소를 할때마다 뭘 어떻게 하는지, 덜 씻은 접시에서 나는 계란 비린내가 풍기는데 복도 청소의 날이었으면 나는 아마 복도 위에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계란 비린내는 없었다.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옅은 향이 풍겼다. 아마 여자들이 쓰는 이런저런 화장품 냄새와 종종 켜는 향초의 잔향이겠지. 겨우 진정했다. 그나저나 오후에 무슨 약속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친구가 서울살이를 정리한다고 세간을 좀 가져가라 했었다. 도저히 못 가겠다고 연락을 했다. 이 상황이면 집 한채를 그냥 준대도 못 가. 미안.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아 송년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늦더라도 오라는 문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모임 멤버 하나한테 연락을 했다.
너 송년회 갔어?
지금 가는중. 너 어디야.
나 못 가. 술 아직 덜깸.
20분안에 데리러 간다.
야!
모임장소가 우이동이랬다. 우이동이 어디야. 의정부 바로 밑. 머리는 몽롱하고 속은 여전히 메슥거리고 밤은 컴컴하고 춥고 우이동이라니. 가는 길이 스산해 귀곡산장같았다. 어느 버스의 종점이라고 했다. 여길 버스타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한 시간이나 달려서 헤메고 헤메 모임 장소에 도착. 맨발. 사람들이 날 보자마자 양말이 없냐고 웃었다. 앉아있던 세 네시간동안 줄곧 놀리는 통에 내일은 꼭 양말을 사야지, 다짐. 속이 뒤틀려 홀짝홀짝 물만 마시는데 피로와 숙취로 눈밑이 시커매 하얀 피부가 더 극적으로 하애보인다. 오랜만에, 아마 5년만일꺼다. 광수오빠를 만났는데 여전히 재미있고 똑똑한 양반이어서 몇마디 나누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새로 사귄 여자친구 사진을 구경하고, 조카 재롱도 구경하고, 조카가 너무 귀여우면 애 욕심은 없어지는거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GS리테일. 광수리테일. 시그널. 광수오빠는 나에게 앞일을 내다보지 말고 그냥 하고싶은대로 살라는 조언을 했다. 뭘 그렇게 내다보고 염려하고 걱정하냐. 그냥 너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아. 오빠는 그렇게 해? 난 여자친구랑 일빼고는 그렇게 하지. 근데 오빠는 왜 그모양이야. 그게 문제야. 광수오빠는 나를 붙들고 홍대에 괜찮은 양말 파는 곳을 알려줬다. 반지야. 너 럭셔리 수 알지? 응. 거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그 하하가 하는 고깃집 아냐? 모르는데.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 거기 양말 괜찮아. 중소기업이 만드는 양말인데 다 국산이야. 오빠는 거기서 사? 종종. 유니클로도 양말 3900원부터야. 좀 사라. 알았어. 헤어지면서도 광수오빠는 당부했다. 반지야, 유니클로 양말 3900원부터야! 꼭 사!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넘었다. 3시였나. 머리에 전기를 맞은것처럼 찌르르 비틀거린다. 웹툰 같은걸 봤다. 절박하게 자야하는 상황에 절박하게 버틴다. 갑자기 복도 앞에서 씨벌씨벌하는 소리가 들린다. 도어락을 못풀어서 집에 못 들어가는 옆집남자의 소리. 꽤 오래 욕을 하면서 문을 쾅쾅 치더니 나중엔 비밀번호가 생각났는지 집으로 쏙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책방에 가야지, 하고 책목록을 살피는데 사려고 일주일넘게 벼뤘던 그 책이 팔리고 없었다.
이틀뒤면 십이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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