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_')()()()/머리

그 때가 아니면

 

 

 

 

 

새로나온 잡지 한권을 어떤 회사의 팀장님께 보냈다. 내가 되게 가고 싶은 회사였었고, 어느 봄날 무작정 찾아갔었고, 어찌보면 무례한 손님의 방문을 팀장님이 기쁘게 맞아주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깊게 내어주셨고 그 마음이 참 감사했다. 그 회사는 못가게 되었지만 문득 새로 나온 잡지를 보며 얼굴들을 떠올리다가 잡지에 작은 메모를 끼워 보냈더랬다. 그 날 참 감사했다고. 아직까지 그 마음이 남아있다고.

 

 

팀장님에게서 회신이 왔다. 깜짝 놀랬고, 마케터가 아닌 에디터로 살기로 한 것은 잘 한 결정같노라고. 메모 말미에 '밥 사주세요!' 라고 적어보냈었는데 - 나는 정말로 그런 성미가 못된다. 뭔가 억지 용감에 용감을 마구 덧입히는 기분인데 - 팀장님이 이번주 점심에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메모에 적은 것은 반 농담이다, 나중에 시간되시면 사주시라고 만류했더니 팀장님이 '생각날 때 먹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게 되더라구요.' 라는 한마디를 보내왔고, 그 한마디에 덜컥 끄덕일 수 밖에 없겠더라. 그 때가 아니면. 그래.

 

 

두어해 전이었을게다. 선배와 각자의 자전거를 끌고 봄밤의 어딘가를 지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나는데 목련이 눈부시게 환했다. 선배는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데, 나는 순간을 영원에 담아보겠다며 핸드폰을 찰칵이고 있었다. 저만치 앞서 걷던 선배가 왈칵 짜증을 냈다. "아 나중에 찍어!" "나중에 언제 찍어요. 지금 아니면 못 찍어요." "아 너희동네잖아." "지금 아니면 못 찍는다고!"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었지만, 정말로 그날 이후 그 곳을 가본 적이 없다. 쉽게 바빴고 쉽게 잊었다. 그렇지만 목련 사진은 아직도 잘 가지고 있고, 문득 들여다보면서 그 날 사진에 담아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날 저녁이었나, 그 다음날이었나 선배가 사과를 했더랬다. "미안하다. 그게 뭐라고 5분도 안 걸릴텐데 짜증내서."

 

 

뭐든 그 때가 아니면 못 하는 것들이 있다. 유행하는 영화, 계절을 타는 음식, 어느 여름밤의 산책 같은 것들. 뻔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 때가 아니면 반드시 못하게 되니까 그 때를 움켜잡아야 한다. 난 그걸 잘 안다. 그래서 그 때를 움켜잡으려고 파닥이는 건지도 모른다. 벌써 가을이 왔고 디디는 저녁이 차갑다. 여름밤마다 길쭉하고 둥근 잎사귀의 그림자에 내 발을 비춰보는 것이 좋았다. 그림자마저 푸르고 싱싱한 여름. 건드리면 통통 기분좋은 소리를 낼 것만 같아, 바람에 와사사- 그림자가 부서지는 것을 동그마니 지켜보기도 했다. 오늘도 밤을 디디며 집에 오는데, 여전히 습관처럼 그림자를 들여다보는데, 그림자가 시들어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나무를 살펴보았다. 벌써 적지 않은 나뭇잎들이 노랗게 쪼그라들었다. 아 정말 가을이구나. 가을이구나. 싱싱하고 통통한 여름이 다 갔구나. 가버렸구나.

 

 

이 가을에는 무엇을 움켜잡아야 할까. 무엇을 움켜쥘 수 있을까. 샤워를 마치고 나면 온 방에 은근히 감도는 겨울의 낌새라던가, 파란 색종이 같은 하늘. 노르스름 고소한 햇살, 조금씩 키를 낮추는 여름의 꽃들. 산뜻한 마음으로.

 

 

 

 

* 도대체 뭐가.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난 정말로 어지러워. 그냥 혼자서 어지럽고 말까요?

 

 

'('_')()()() > 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자국  (0) 2015.09.17
   (0) 2015.09.15
   (0) 2015.09.08
그러니까 나는,  (0) 2015.09.05
나의 정체  (0) 201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