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_')()()()/머리

그러니까 나는,

 

 

 △ 내 인생 네 번째 축가인가.

어느 책에 보면 인생에서 꼭 해보아야 할 일에 '축가 부르기' 가 있던데 난 이 정도면 선빵했다.

 

 

 

그렇게 비가 퍼부을줄 몰랐다. 회색과 남색을 놓고 - 왜 맨날 옷은 회색이랑 남색인거냐! - 고민을 하다가 미국에 사는 코디분의 결정에 따라서 남색으로 결정.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코디는 이 옷을 모른다는 것. 아무튼!) 발목께까지 오는 치르렁 파르렁한 드레스를 입고 옆구리엔 핸드백, 등쪽엔 우쿨렐레를 메고 나서려는데 밖에 슬금슬금 비가 온다. 아아. 비닐우산 하나 추가요.

 

 

비닐우산 위에 톡톡 내려앉는 빗방울을 보며 살금 낭만에 젖어있다가, 이게 왠일이냐.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하늘이 쩍쩍 갈라지며 우산 위에 금세 냇물이 흐른다. 치마끝부터 젖어드나 싶더니 이 짐을 다 들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시 내려 방향을 헤메이며 걷는 동안안 치마끝에 매달린 물기가 어깨까지 올라왔다. 결국 한 시간 반이나 걸렸고, 옷은 생쥐마냥 쫄딱 젖었으며, 신랑이 다급해 전화를 했다. '너 어디야!' '오빠 나 축가 안하면 안될까'

 

 

도착하니 식전 10분. 얼른 사회자에게 축가 부를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마이크를 대충 세팅하는데 왜 또 코드는 안맞는거니. 우쿨렐레야. 왜 아쟁 인척 하는거냐. 조정실에 들어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튜닝을 미친듯이 하는데 직원이 한마디 한다. '식 2분 전입니다.' 식은 시작됐고 마음이 급해 우쿨렐레를 들고 뛰어나가 축의금 걷는 남자 뒤에 쭈그리고 앉아 튜닝을 했다. 되...되겠지? 아몰랑.

 

 

 

*

 

 

 

악기를 쥐고 무대와 가까운 테이블에 동그마니 앉아있는데 옆의 어르신들이 묻는다. 무슨 사이예요? 신부 친구? 아니예요. 후배예요^^. 어쩐지 어려보이더라. 금세 축가. 축가의 스타트. 이 넓은 공간을 저 작은 악기로 채워야 하다니. 마이크가 자꾸 고정되지 않고 아래로 흘러내려 어쩔줄 모르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튀어나온다. 아. 참 미워할 수 없는 저 얼굴. 노래 부르는 내 앞에서 부산스레 왔다갔다하며 마이크를 이리만졌다 저리만졌다 하기에 노래를 부르다가 그만 쿡 웃어버렸다. 정신없이 노래를 끝내고 자리에 가서 앉는데 내 등을 툭 치는 손. 고개를 돌려보니 나를 향해서 추켜세우는 엄지. 

 

 

그러니까 우리가 연락을 안한지가 얼마만인가. 1년? 2년? 그 때 왜 싸웠었지? 내가 왜 너한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었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늘 그랬듯이. 늘 그렇듯이. 

 

 

신랑 친구들 사진 촬영. 내가 그 애 바로 앞줄. 나에게만 가만히 닿는 좋은 목소리.

'너 그거 같아. 미야자키 하야오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

'또 뭐. 욕이냐.'

'예쁘다고. 예뻐서.'

 

 

셔터와 셔터 사이에 그 애는 끊임없이 내게 장난을 친다. 늘 그랬고 늘 그렇듯이. 팔꿈치로 내 어깨를 꽉 눌렀다가 내 머리 냄새를 킁킁 맡았다가. 사진에 남을 그 애 얼굴 표정은 안봐도 안다. 늘 한결같이 반듯하게 웃고 있겠지.

 

 

 

*

 

 

 

커피 한잔 마시고 가.

 

 

나는 이 얼굴만 보면 괜히 심술이 나서 입술을 삐죽이게 된다. '왜!왜!왜!'

심술맞게 굴어도 슬그머니 내 옆에 와서 나랑 발을 맞추고 나를 기다려줄걸 안다. 늘 고개를 돌려보면 내 옆에 있었으니까. 급하게 식장으로 들이닥치느라 축의금을 못낸 내가 봉투를 들고 두리번거리니 그 애가 나를 끌고 신랑에게 데려다준다. 그리고 다른 무리들과 섞여 함께 커피숍으로 갔다. 그 애는 다른 자리에 있었는데, 내 쪽을 흘끔거리다가 금세 내 곁에 와서 앉았다. 늘 그랬으니까.

 

 

'너는 정말 똑같다. 여전히.'

내 얼굴을 가만히 보는 너.

 

 

늘 우리가 주고 받던 대화 한 자락이 또 안나올리 없지. 

 

 

'결혼은 안 해?' 내가 물었다. 

'해.'

'언제?'

'10월'

'곧이네!'

'넌 남자친구 있지?'

'아니 없어.'

'넌 왜 맨날 있다없다하냐?'

'나 니 결혼식 못가도 돼?' 

'...니 맘대로 해라.'

 

 

우리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게 2년전인지 언젠지 모르겠는데, 서울에서 대구로 향하는 기차역에서 그 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나도 결혼 늦게 할꺼고, 너도 생각없는거 같으니까 그때 둘다 결혼할 사람 없으면 결혼하자. 니 남편 후보 3등 정도에는 넣어줘.' 라고.

 

 

청첩장을 달래서 받고, 신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예쁘네! 몇살이야?' 라고 묻고, '서로 사랑하는거 맞아? 왜 이렇게 안 친해보여?' 라고 삐죽삐죽 놀리고, 결국에는 행복하게 예쁘게 잘 살라고 말해줬다. 

 

'나 보란듯이 잘 살려고.'

'보이려고 잘 살지 말고, 그냥 너 행복하게 잘 살아.'

'나 ○○○공원에 살아. 이제.'

'오 거기가 신혼집이야? 나 그 공원 진짜 좋아해. 자주 가.'

'우리집에서 바로 보여. 오면 연락해!'

'미친. 남의 신랑을 왜 불러내냐.'

'왜! 보면 안되냐?' 

 

  

내 무릎께의 치맛자락을 살금 만지기에 '왜?' 라고 물었더니 '예쁘네...' 라고 중얼거린다. 뒤이어 무릎에 놓은 내 가방을 보고는 '맞춘거야?' 라고 묻는다. '뭘?' '너 가방이랑 머리끈 색깔 빨간걸로 맞춘거냐고. 예뻐서.'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하고 또 싫어해. 포인트로 가방과 머리끈 색깔을 빨간색으로 맞춘게 맞다. 옷도 심심하고 머리도 슥 묶어버려서 머리끈으로 혼자만의 작은 포인트를 주려고, 급한 와중에도 빨간색 머리끈 하나를 챙겼었다. 짐짓 무심한척 하면서 '아닌데. 머리끈이 빨간거 밖에 없어.' 라고 심드렁하게 말했고, 그 애가 가만히 묶은 내 머리 끝을 어루만졌다.

 

 

 

*

 

 

 

여자친구 있는 남자와 키스를 한 적이 있다. 딱 한 번. 혹은 두 번. 같은 사람과. 내가 받아주기만 하면 다 버리고 나에게 오겠다고, 그 애는 늘 말했다. 그 애 옆에 있는 사람이 늘 바뀌었는데도 그 애는 나를 볼 때마다 늘 똑같은 말을 했다. 다 버리고 나에게 진지하게 다시 말하라고.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그걸 염려하지 말라고 .그렇지만 네가 다 버리고 나에게 온대도 나는 안 받아줄꺼라고, 나도 그 애를 볼 때마다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지난 연애들을 가끔 꼽아보다 아주 사소한 인연도 기억해내곤 했는데, 이상하게 그 애는 한번도 떠올린 적이 없다. 한 번도 연애가 아니었으니까. 그 애는 나를 보러 나의 고향에도 왔고, 내가 다른 도시에 잠시 가 살때도 기타를 메고 나를 보러 왔다. 을씨년스러운 엑스포 공원을 어른이 되서 다시 가 본것도 이 애와 함께였다. 어디를 가자고 하다가 갑자기 문득 급한 일이 생겨 나를 도로 위에 떨어뜨리고 간 적도 있고, 스물 네살이었던 나를 서울까지 불러올려 남대문 근처에서 울렸던 것도 이 아이다. 다들 엠티를 갔을 때 기타를 챙겨와 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불러주던 것도 이 아이고, 문구점에서 내가 갖고 싶어하던 커다란 노트를 사준것도 이 아이다. 바쁜 업무를 끝내고 늦게 우리동네로 와서 죽을 사준 것도 이 아이다. 이 아이는 늘 얄미웠다. 한번도 나에게 집중을 안했다. 나를 문득문득 좋아했다. 1년, 2년을 우습게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문득 이렇게 오늘같이 만나는 날이면, 나만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서 몹시 흔들렸다. 온통 흔들릴 작정밖에 없는 사람 같았다. 나를 차에 태우고 어느 동네에 가서 시덥잖은 말들을 뱉어내다가 다 버리고 너에게 가겠다고 말했다. 이 아이와 몇 번의 입맞춤이 있었을까. 세 번 ? 네 번? 키스를 하고 머쓱한 공기를 어쩔줄 몰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이죽거렸다.

 

'키스 왜 이렇게 못하냐!'

'지는.'

 

 

 

*

 

 

 

까페에서 먼저 일어나면서 작은 입모양으로 '결혼하기 전에 한 번 봐.' 라고 그 애를 향해 말했다. 그 애가 '홍대로 갈게.' 라고 나를 올려다보면서 끄덕거렸다. 우리의 찐득한 인연도 여기까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둘 중 하나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계속 이랬을테니까. 너는 나를 문득문득 좋아하고, 나는 그런 너를 떠올리면 머리끝까지 화가나서 '넌 어차피 나에게 와도 문득문득 다른 사람을 좋아할거라고. 절대 너는 나에게 집중하지 못할거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하겠지. 그러다가 오늘같이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면, 우리는 또 같이 붙어있고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결국에는 서로를 할퀴면서 싸우겠지. 네 전화번호는 나에게 스팸번호로 등록이고.

 

 

널 처음 봤을때가 기억 나. 내가 그때 아직 대학생이었으니까 도대체 몇 년전이야. 나는 관객석에 있었고 넌 무대에서 사회를 보고 있었어. 그 넓고 큰 강당에서. 저만치서 널 보고 '우와 저 사람 진짜 멋있다' 라고 생각했었어. 너한테는 한번도 말하지 않았었지만. 너랑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모르겠는데, 단박에 네가 내 가까이 왔어. 내 이름을 듣고는 '반전 드라마?' 라면서 키득거린 것도 아직 기억나.

 

 

이상하게 결혼한다는 네 말이 오늘 하루종일 머리에 남는 것이, 집에 돌아와서도 너를 떠올렸던 것이, 어쩌면 나도 문득문득 너를 좋아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내 앞에서 짐짓 결혼이 하기 싫은듯 연기를 하는 네 모습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던 것이, 나도 어쩌면 문득문득 너를 좋아한 게 맞는거라고. 문득문득 너를 몹시도 좋아했노라고.

 

 

결혼하기 전에 홍대로 와라. 내가 최고로 예쁘게 하고 나간다. 너 정말 아쉽게. 나의 마지막 못된 심술이랄까.

내가 예뻐가는걸 문득문득 본 사람아.

 

 

 

 

 

'('_')()()() > 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때가 아니면  (2) 2015.09.09
   (0) 2015.09.08
나의 정체  (0) 2015.09.03
푸른,  (0) 2015.09.02
미래에서 기다릴게  (2) 201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