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_')()()()/머리

어떻게든

 

△ 대만을 함께 여행했던 홍콩왕자와.

 

 

 

 

어제 문득 다이어리를 뒤지다가 폴라로이드 몇 장을 발견해 현진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

'이게 너라고?'

'그럼 나지 누구야.'

'너 왤케 이뻐?' ← 평소에도 나에게 늘 호의적임

'나?'

'어 넌줄 못알아봤어.'

'야 지금 내가 그렇게 못생겼냐!'

'아니아니 앞머리 없으니까 개여신'

 

 

호 그래? 자신감 충만해 앞머리 없던 불과 몇 개월전의 사진으로 회사 메신저 프로필을 바꿨다. 맞은편 신입이 물어본다.

 

 

'어 이거 기자님이예요?'

'응'

'언제예요?'

'얼마 안됐는데? 앞머리 없어서 그래.'

'와 대박. 진짜 예뻐요. 하연수 닮았다'

 

 

그래그래. 누구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하연수였어. 현진도 맞장구를 치며 하연수에 힘을 보탰다.

아 앞머리. 다시 없애야 하나.

 

 

△ 하연수씨, 제가 늘 좋아합니다. 잘 계시죠?  

 

 

 

*

 

 

 

앞머리를 없애면 다시 연수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만 여행 사진을 보고 있으니 문득 웃음이 난다. 작년 11월 31일부로 백수가 되었고 동동거리면서 재취업 준비를 했다. 지친 12월 어느 겨울밤이었을거다. 2호선 강남역에 우두커니서서 전철을 기다리는데 밀려오는 전철의 뜨거운 바람을 더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못 살겠다 나. 핸드폰을 토닥거리며 아무데나 갈 수 있는 싼 비행기표를 검색했다. 비행기를 못 타본지도 5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뭘 하면서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만 했는데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는 느낌.

 

 

카오슝이라는 도시로 가는 비행기표가 쌌다. 무작정 끊었다. 나중에 보니 거기가 대만이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알지만 대만이 중국어를 쓴다는 것도 쌔카맣게 잊고 있었다. 시간맞춰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날아갔다. 도착해서 알았다. 거기가 중국어를 쓴다는 걸. 페이스북으로 어느 숙소 주인에게 가고 싶다고 말했고, 연말이라 거실 빼고는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기꺼이 그렇게 할게요. 대만에 도착해 창구에 물어 교통카드를 사고 숙소를 찾아갔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구글지도를 쓸 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전철역에 내려 뚜벅뚜벅 물어 걸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어느 건물로 들어섰는데 페이스북에서 본 주인과 아이가 나왔다. 어. 나예요. 아니 어떻게 여길 혼자 찾아왔어요? 그냥요.

 

 

다행이었다. 그 건물에서 못 마주쳤으면 해외에서 전화한통 쓸 수 없었던 나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아무 숙소나 잡아 들어가 작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거나 뭐 어쨌거나 했겠지. 숙소에 들어서 가방을 풀고 두리번거리는데 곧 뒤따라 한 남자애가-사진속의 홍콩왕자-가 철로를 깐 이빨로 활짝 웃어보이며 들어왔다. 홍콩에서 왔다고 했다. 혼자 여행한다는 말에 나도 그러니까 나 좀 데리고 다니면 안되냐고 물었다. 그러마.

 

 

그 친구는 사진을 찍는 친구였다. 대만에서 묵는 5일동안 별다르게 한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었다. 거기는 그냥 대만의 작은 항구도시였으니까. 홍콩왕자를 졸졸 쫓아다니며 여기저기를 다녔다. 함께 바닷가의 석양을 보러가고, 야시장에서 밥을 사먹고, 이케아에서 하루를 다 날려먹고, 광장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같이 맥주병을 부딪쳤다. 그리고 폴라로이드 한 장을 찍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어느 사진을 보내주며 '여기 기억나? 우리가 여기서 석양을 봤었어.' 했을 때는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은 꼭 이런 애를 만나야지.

 

 

더럽고 작은 시장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어느 빵집에 길을 물었는데 내가 불안해 보였던지 그 집 아들이 뛰어나와 길을 알려주었다. 알려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몇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않아 거의 죽상에 울상에 진상 범벅이 되어있었는데, 그 아들이 퇴근을 하며 죽울진상의 나를 보고 어디까지 가느냐며 오토바이로 태워주었다. 오토바이에 꼭 붙들려 해변을 끼고 씽씽 달리는데 그 기분이 와. 너무 빨라서 죽을 것 같았는데 뻥 뚫리는 마음에 으아!!!!!! 소리를 꽥 질렀다. 마침 내가 가려는 곳은 대만국민은 무료 입장이라 그 아들도 함께 나와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기차시간이 늦었지만 오토바이에 붙들려서 쌩 달린덕에 무사히 도착했고, 그 아들이 나를 플랫폼까지 바래다주었다. 몇번이나 여기서 타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그 친구를 보고 역무원 아저씨가 웃었다. 너 이제 그만 가라고.

 

 

 

*

 

 

 

대만을 다녀와서 태국을 가기전까지 엄청난 무게의 시간을 견뎌야했다. 대만을 다녀오고 리프레쉬를 하고 나면 산뜻하게 새출발을 할 줄 알았다. 뭐가 잘 안됐다. 취직을 할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감이 서지 않았으며 친구는 이혼하겠노라고 매일 새벽 눈물바람으로 나를 찾았다. 그러면서 내가 일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무거운 시간들에 우울이 따라붙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늘 방에 누워있었다. 낮에는 깊게 커튼을 쳤다. 겨울은 춥고 나는 얼어붙었다.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봄이 오자마자 나는 작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태국은 십년전부터 늘 가고 싶었다. 카오산 로드를 가고 싶었다. 백수 3개월차에 접어들고 있었고 현실이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빨리 일을 해야하는데 내 마음은 태국이 아니면 안된다고 내 안에 온통 불을 놓고 있었다. 몇 주를 고민했다. 갈까 말까. 가도 될까. 처음에는 현실 타협으로 제주도를 갔다. 제주도를 갔다온 뒤 태국행 비행기표는 취소해버릴 생각이었다. 3일만 머무르려고 불쑥 밤비행기를 타고 떠난 제주도였건만 일주일을 머무르게 되었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온 바로 다음날이 태국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칼바람이 얼굴을 할퀴는 제주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캐리어를 풀어해치고 여름옷들을 채워넣었다. 에라. 몰라.

 

 

베트남을 경유해 태국에 도착했다. 꼬부랑 글씨들을 보니 진짜 여기가 태국이구나 싶었다. 카오산 로드를 가겠다고 무작정 비행기표만 딸랑 끊어 온거니까 카오산 로드로 가야지. 어떻게 갈까. 공항에서 나와서 무작정 씨티라인쪽으로 걸었다. 매표기 앞에 선 남자에게 영어로 카오산 로드로 가려면 어느 역인지를 물었고, 그 아이가 중국어로 영어를 못한다고 대답했다. 씨익.

 

 

지하철에서 방언이 터졌다. 그 남자아이는 게이였다. 게이란건 나중에 알았다. 너는 어디서 왔냐, 어디로 가냐, 여자애가 혼자 어떻게 카오산을 가려고 그러냐, 거긴 더럽고 위험하다, 함께 내가 머무는 숙소로 가자, 하룻밤에 얼만지 지금 당장 알아봐주겠다... 고맙지만 그 아이의 호의를 거절하고 카오산으로 가겠노라고 했다. 어느 역에 내려서 달라붙는 툭툭기사들을 물리치고 택시를 타며 '미터!!' 라고 노련하게 말한 후, 숙소 근처의 어느 건물에 내렸다. 나는 나중에 알았다. 동남아란 위험하다고 책에 적혀있다고. 아무에게나 말을 붙이지 말고 누가 주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왤까.

 

 

오토바이 아저씨들은 친절했다. 나를 도와 함께 숙소를 찾아주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태국말을 몰라 '똠양꿍' 하며 고맙다는 뜻을 전하는 나를 보며 한참 웃었다. 노점의 아저씨들도 친절했다. 길을 걷는 나를 보며 씽긋 웃으며 과자나 과일 따위를 건네주었고 나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따뜻하고 달고 시원했다.

 

 

혼자 방콕의 룸피니 공원을 가서 오리배를 보고 있었던 어느날엔, 기름지게 생긴 미국계 아저씨가 같이 오리배를 타자고 제안했다. 오리배를 몹시 타고 싶었고 혼자 발을 젓기엔 부족했으므로 기꺼이 같이 탔다. 오리배를 타고 나오자 아저씨는 함께 밤을 보내자고 했다. 매서운 표정으로 '아임 낫 댓 타임 걸' 이라고 말하자, 그저 신나게 술 마시고 춤추자고 했다. 자기는 예쁜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뿐이라고. 난 댄싱도 드링킹도 싫어한다고 여전히 칼바람 부는 표정으로 대꾸했더니, 자기가 돈이 많다고 했다. 내가 씩 웃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바람이 나왔다. 아저씨가 내 손을 슬쩍 잡았고 손을 뿌리치며 '노!' 라고 말하자 진지한 표정으로 아저씨가 물었다. '너 혹시 레즈비언이니?'

 

 

그 날 저녁이었나. 배를 타고 강 끝까지 갔다. 벤치의 양끝에 남자가 한명씩 앉아있어서 가운데를 파고 들 수 밖에 없었다. 난 몹시 지쳤다. 어둑해지는 저녁을 올려다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붙였던가 남자애가 먼저 사진을 찍자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인과 처음 이야기 해본다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슈얼.

 

 

나도 태국인과는 처음 이야기 해본다. 그 아이도 사진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 아이가 사진찍는 뒷모습을 가만히 몇 장 찍었다. 그 아이가 툭툭을 태워줬다. 외국인인 나를 상대로 부르는 값의 1/6도 안되었다. 툭툭을 타고 막 웃었다. 맥주도 한 병 나눠마셨다. 태국의 사원에 바치는 꽃들을 파는 작은 시장에도 갔다. 온통 노란 꽃밖에 없었다. 시장의 꽃파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조용히 양손을 모아 인사했다. 나도 양손을 가만히 모아 인사했다.

 

 

 

*

 

 

 

태국 북부로 갔다. 아무 계획이 없었으므로 어디든 상관없었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 남자애둘이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가서 해변도 보고 바다도 만지자고. 나는 북쪽으로 갈게요. 카오산로드에 굿바이 키스를 보내고 방콕에서 비행기를 타고 치앙마이로 간 뒤, 어느 도시에서 다시 작은 빵차를 타고 네 시간을 달려 빠이로 갔다. 유럽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머물렀는데, 하룻밤을 지내고 보니 꽤 비쌌다. 젠장 삼일치 돈을 미리냈는데. 죄다 유럽인들이 몰려다니며 소리와 냄새를 피우는 가운데 작은 동양 여자애가 홀로 있었다. 둘이 영어로 대화를 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서로의 나라를 물었다. 타이완 소녀. 어 나 중국말 할 줄 아는데. 중국어로 모든 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종종 우리의 대화 내용이 궁금했던지 유럽 아이들이 '영어로 해주면 안되겠니?' 라고 물었다. 난 너희들이 영어로 하는 말도 잘 모르겠다 뻑큐다 이 자식들아.  

 

 

타이완 소녀는 유럽인들의 등쌀에 못이겨 그 다음날 곧바로 숙소를 옮겼는데, 그 숙소에 머무르려 온 친구들을 죄다 함께 만나 우리는 같이 여행을 떠났다. 일본, 타이완, 중국, 한국. 아시아 원정대라며 우리끼리 낄낄거렸고 드문드문 우리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느 나라 아이니?' 라며 물었다. 중국어와 일어와 영어가 왔다갔다 했으니까. 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베트남으로 떠나고, 티베트로 향했다. 나는 어디로 갈까. 치앙마이로 가겠다는 내게 중국아이가 따라 붙었다. 그 아이도 계획이 없댔다. 그래.

 

 

둘이 치앙마이에 도착하자마자 오토바이 하나를 빌려 치앙마이 여기저기를 누볐다. 참 나는 낯선 남자 허리춤에 잘도 매달리는구나. 대만에서도, 제주도에서도, 태국에서도 나를 오토바이 태워주는 남자가 있다니. 시커먼 숲속의 여름 공기를 가르는 기분은 말로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치앙마이에서 삼일을 같이 보냈을거다. 돈을 아끼기 위해 같은 방을 썼는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부러 과격하게 굴었다. 그 아이가 '와. 진짜 너는 껍데기만 여자야. 따 한즈! (대장부)' 라며 고개를 저었고 그제야 나는 좀 안심했던 것 같다.

 

 

 

*

 

 

 

문득 아주 오래전, 영국을 갔다가 돌아오던 전철안이 떠오른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출근시간 직장인들 사이에 끼여 끙끙 거리는 내게 누군가가 '어디가냐'고 물었고 나는 '컴백홈!!!!' 이라고 외쳤다. 서태지냐. 고백홈이라고 했었어야지.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가방과 함께 나동그라져 '아우씨!!!!!!!!!!!'라고 욕을 하는 내게 한국인 남자가 말을 붙였다. (뜨끔)

 

 

'집에 가시나봐요?'

'아...예.'

'기운 좋으시네요.'

'하하하하하하하'

'어디 여행하셨어요?'

'전 영국만요.'

'아오. 영국... 난 영국 다시는 안올꺼예요! 신사의 나라는 개뿔'

'왜요? 너무 좋던데. 다들 친절하고...'

'뭐가 친절해요. 길 물어보면 알려주지도 않고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는데.'

 

 

그때 퍼뜩 책에서 본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양 여자는 세계 어딜가나 사랑받는다.'

영국은 정말 신사밖에 없는 것 같았는데. 항상 웃어주고 뭘 물어보면 끝까지 알려주고, 공원 벤치에 앉아있으면 불쑥 사랑한다고 누군가가 말하고 지나가고, 시장을 구경하다 누군가의 큰 소리에 깜짝 놀랄라치면 왠 미청년이 날 살짝 끌어안으며 '스위티. 아임 쏘 쏘리' (햐) 해주고.

 

 

 

*

 

 

 

/ 니 남자있나.

/ 있어도 없고 없어도 없는건데 지금은 진짜 없음.

/ 니처럼 그래 따지다가 노처녀 급행열차 타는거다.

/ 내가 뭘 따져.

/ 남자 얼굴 잘 생긴거 필요없고, 키도 그냥 니보다 안 작으면 되고, 대기업 필요없다. 처자식 안굶기면 된다.

/ 임마 내 그런거 따지는거 아니거든.

/ 반지야. 남자 별거없다. 성격 좋으면 된다.

/ 야임마 니는 왜 니 여친 얼굴따지는데. 니부터 솔선수범해라 웃기네.

/ 내 아는 형 중에 한의사 있는데 만나볼래?

/ 니가 그런 인맥도 있나?

/ 지금 공부중인데 한 3년 걸리다카드라. 만나볼래?

 

 

하나밖에 없는 한살터울 남동생은 하나밖에 없는 한살터울 누나야가 노처녀 급행열차탈까봐 요즘 난리가 났다. 내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니 우리누나 어쩌까 싶은갑다.

 

 

/ 니는 이상형이 뭔데?

/ 돈많고 명짧은 할매.

/ 이 시끼가 진짜.

/ 아님 170에 몸매 졸라 빵빵한 애.

 

 

말을 말자.

 

 

 

'('_')()()() > 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니까 종원씨가  (0) 2015.08.11
터닝포인트  (0) 2015.08.10
너는 엉뚱해  (2) 2015.08.06
  (0) 2015.08.04
   (0) 2015.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