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날씨

2014년 11월 5일 다급한 저녁 : 복 받을 준비 하시구요

 

홍대 고스펑크 사장님! 감사합니다.

 

 

머리도 회사에서 감는 녀자지만 후다닥 정숙한 여인네의 차림을 하고, 종종종 퇴근길을 서두른다. 홍대 근처에서 꽤 중요한 미팅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놈의 핸드폰. 홍대 전철역에서 켜지질 않는다. 길을 헤멜 것을 계산해서 좀 넉넉하게 나왔지만 핸드폰이 꺼지는건 계산에 없었는데 오마갓. 기억을 떠올려 그 근처까지는 더듬거리며 찾아왔지만, 전화 한 통 할 수 없으니 낭패. 홍대 옷가게 거리를 똥 마려운 개마냥 불안하게 왔다갔다하다가 <고스펑크>를 발견. 컴퓨터를 하고 있는 사장님에게 냅다 "사장님, 저 여기서 옷 두 번 샀는데요 컴퓨터 한 번만 할 수 있을까요!" 라고 용기내 고백해 버렸다. 너무 급하면 이런 용기도 나는거구나. 고스펑크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정숙한 옷차림이었지만, 완전 거짓말은 아닌 것이 친구가 여기서 옷 두벌을 샀다. 작년 즈음에. 그 친구와는 사소한 일로 감정이 틀어져서 거의 1년째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나쁜 년.

 

아무튼 사장님은 친절히 컴퓨터를 비켜주고, 모니터로 지도를 들여다보면서도 도대체 어딘지 가늠조차 못하는 나를 위해 친절히 약도도 그려주셨다. 눈물 찍. 가게를 나서면서 재차 "이쪽이요?" 라고 확인하니 "아니, 저쪽이요." 라면서 몇 번이나 또박또박 설명까지 해주셨다. 사장님, 제가 옷장만 좀 커지면 스타일 바꿔볼게요.

 

고마움과 조급함이 뒤범벅된 뜨거운 발걸음을 안고 사장님이 알려주신 골목으로 입성! 골목에만 들어서면 어찌됐건 간판을 보고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아뿔싸! 골목을 잘못 든건가? 골목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몇번을 왔다갔다해도 없다. 울고 싶다. 좀 어리숙하고 순해보이는 인상을 골라 (그래서 내가 잘 걸리는건가!) "핸드폰 한번만 쓸 수 있어요?" 라고 하니, 데이터가 없단다. 이봐. 내가 데이터 거지라서 아는데 데이터 가뭄은 적어도 보름 지난 후에 시작되는거거든! 당장 핸드폰을 뺏어서 데이터 잔여량을 확인하고 싶지만, 빌려주기 싫다는 거겠지. 그 다음 타킷은 외국인. 내 말을 못 알아듣는척 한다. 절망이다. 미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도 위치도 확인할 수 없는 노 핸드폰 인생. 내가 어쩌다 이렇게 기계의 노예가 되어버렸나. 초조함과 기계 문명에의 지나친 의지에 따른 의지 상실을 분초를 다퉈 경험하고 있는데, 골목에서 쭈뼛 서서 "나 핸드폰 있지롱" 이라는 포즈로 핸드폰 검색에 열을 올리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저 죄송한데 핸드폰 한번만 쓸 수 있어요?" 흔쾌히 빌려주는 남자. 감사합니다. 핸드폰 조작이 미숙하니, 나를 도와 몇 번이나 검색을 해주었다. 미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하니, 나보다 더 조급해하며 골목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함께 두리번 거리며 건물 찾는 것도 도와준다. 감동의 쓰나미. 가게를 찾지 못해서 결국 전화도 한 통 빌려 위치를 파악했는데, 도무지 보이지 않다가 그 분이 찾아주었다. 아. 간판이 없었구나.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며, 음료라도 사드리겠다고 하니 됐다고, 미팅 잘 하시길 바란다며 건물 앞에서 빠샤! 포즈로 화이팅을 빌어주는 남자분. 그대 이름은 훈남. 정말 훈훈하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는다. 건물 앞에서 운동화를 구두로 급하게 갈아신었다. 홍대 남자 두 명 덕분에 나의 목숨은 살았다. 다들 복 많이 받으셔요.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