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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굳이 여기에 있을 이유 같은 것

 

 

 

어찌어찌한 사정으로 친구가 희망 퇴직서를 내고 위로가 얼만큼 될는지는 모르는 위로금과 퇴직금을 양손에 받아들고 나와서 하는 말이 "그러면 난 굳이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어." 란다.

 

아 그렇구나. 학교와 직장 때문에 20대를 오롯이 서울에서 맞이하고 보내는 친구의 말이다. 그러네, 넌 학교도 졸업했고 직장도 (지금은) 없으니 그 비싼 월세를 꼬박꼬박 감당하면서 여기 있을 이유가 정말로 없는거구나. 그러고 보니까 어쩌면 되게 담백하게 일상을 떨쳐내 버릴 수도 있는거구나. 피식.

 

나도 졸업하고 나서 인턴에, 수습에, 정말로 하루에 한 시간 자면서 업무량을 감당하느라 쌔가 빠지게 고생도 해보고 눈물도 쏙 빼보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또다시 고생도 하고 눈물도 쏙 빼보니, 겨우 생활의 안정권이다 싶은 마음이 드는 이 때 간악하게도 일상에 대한 환멸이 슬금슬금 몰려온다. 환상에 대한 멸망. 내 환상도 이제는 일상으로 바뀐지 오래고, 일상에 대한 설렘은 씨가 꺼진지 오래다. 요즘 유독 회사 생활을 못 견디겠고, 퇴근해서 돌아오면 그대로 픽 쓰러지는 내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난 아무래도 내 인생에 할당된 직장생활의 총량을 다 채워버린 것만 같다.

 

3년차 선배에게 "직장생활을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뭐죠?" 라고 했더니 "너도 애 둘 싸질러 봐."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책임의 무게. 누군가에 대해 책임을 오롯이, 기꺼이 떠안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나이와 처지가 불쑥 찾아오기 전에, 할 수만 있다면 요리조리 잘도 피해다니고 싶다. 비행기를 타고 다녀오는 여행을 못 간지도 벌써 햇수로 6년이 되었는데 (직장 생활 시작하고 한 번도 못 갔으니), 여가를 이용해 여기저기 다녀온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부러운 마음이 예전보단 덜하다. 그렇게 잠깐씩 다녀오는 여행은 지금 내 처지에서는 갈증만 더할 것 같아서 아예 맛보기를 차단하자는 내 나름의 방어기제 일 수도 있겠고.

 

아주 어릴때부터 당연하게 생각해 온 사실인데, 일단 결혼이라는 제도가 내 인생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된다면 외국 남자와 하고 싶다는 것. 사람들, 특히 한국 오래비들이 그런 내 얘기를 들으면 펄쩍 뛰면서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데. 외국인이랑 결혼하면 절대 안된다. 한국인은 한국인이랑 결혼해야 돼." 라며 -나와는 정 반대되는 가치관으로 나의 가치관을 - 반대한다. 외국 남자와 결혼하려는 이유를 물어오면 "아이가 이쁘잖아요" 라는 대답을 들려주는데, 그러면 또 "인종 차별 주의자, 사대주의." 라면서 맹독 화살이 돌아온다. 설마 진짜 혼혈아를 낳고 싶어서 외국인이랑 결혼한다고 하겠는가마는, 특별히 이유가 없으니 그렇게 둘러대는 것인데 나를 인종차별주의자로 싸잡아 비난하니 머쓱하긴 하다. (뭐 그리고 내 배에서 그렇게 이쁜 아이가 나오는지 실험도 해보고 싶긴 하고. 랜덤이다.)

 

외국 남자와 결혼하면 일단 재밌을 것 같다. 문화권이 다르니까 오래오래 같이 살아도 끊임없이 탐구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고, 외국 사람 특유의 여유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스킬 이런 걸 옆에서 좀 배우고 싶다. 예를 들면 해뜨면 그냥 동네 잔디밭에 배 깔고 드러눕는 일 따위. 한국 사회에서 남 눈치 보느라 이미 진이 빠질대로 빠진 나는, 이제는 내가 눈치를 보는지도 아닌지도 모르고 남들이 정해준 틀에 나를 끼워넣고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이 된 것 같아서 애처롭단 말이다. 계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떠나게 된다면 결혼할 남자랑 떠났으면 좋겠고) 일단은 그냥 다 내려놓고 자전거 타고 대륙 일주나 좀 했으면 좋겠다 싶다.

 

음악을 하는 남자나 여행을 오래 한 남자들한테 내가 계속 끌리는 것도 그들 특유의 어떤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분방함이 좋아서 인 것 같다. 내 안에 결핍된 걸 남이 가지고 있으면 진짜 동물적으로 감지할 수 있으니까. 계속 요즘 다 내려놓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는 가운데, 내가 계속 억눌러왔던 내 안의 어떤 기제들은 내 삶에서 한번은 발현되어야 하는 걸 알고 내 스스로 그런 것들에 대한 표현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고 그걸 억누르기도 점점 힘들어진다. 그리고 내 안에서 되게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날 것의 어떤 욕구들과 나란히 자라나는게 안정에 대한 욕구, 인정에 대한 욕구다. 내 나이에 걸맞게 인생의 어떤 짐들은 척 하고 짊어질 수 있는 안정된 삶, 그리고 그 안정된 삶 속에서 부모와 친구와 배우자와 그 밖의 타인들에게 '나 이만한 짐도 짊어질 수 있어요,' 라며 예쁨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나란히 자라난다.

 

나는 내 인생의 토막들을 좀 내 식대로 조리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캐릭터가 확실하고, '내 식 대로' 라는 것에 확신이 없어서 쭈볏거리긴 하지만 타고난 캐릭터 때문에 언젠가는 그렇게 살아야 할 텐데 지금까지는 내 태생을 무시하고 계속 억누르면서 살아왔다면 이제는 억누르는 것 조차 되게 버겁다고 해야하나. 나는 손으로 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느낌도 계속 온다. 글을 쓰든, 요리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뭔가를 만지고 보다듬고 있으면 편안하고 기분이 좋다. 좀 다른 차원으로 기분이 좋다.

 

겨우 익숙해졌는데, 이제사 겨우 서울 생활을 틀을 잡아놓고 친구들도 좀 만들고, 그렇게 원하던 소속도 가지게 됐는데 이걸 또 밥상 엎듯 와장창 한번은 뒤엎어야 한다. 선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안의 이런 저런 욕구들을 거울 꿰듯 뚫어보고 "넌 결혼을 해. 결혼해서 주는 안정감이 너의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거야. 너는 좋은 아내이자 엄마가 될 거야." 라는 말을 많이 한다. 실제로 꽤 정확하다는 타로 괘에서도 끝없이 나오는 괘가 '나의 결혼'에 대한 점괘다. 나는 결혼으로 모든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고, 내 인생의 태양을 만나게 되는 격이라고 나온다. 그 때 괘를 보면서 "그러니까 도대체 언제요!" 라고 다그치듯 물었더니 언제라고는 했는데, 계속 두고보고 있긴 하다.

 

나에게는 너무 요원한 키워드. 결혼. 진짜로 나는 결혼을 하면 자유로운 삶에 대한 내 안의 뜨거운 욕구가 잠잠히 가라 앉게 될까. 아니면 진짜로 내 손을 잡고 저 멀리 모험을 함께 해 줄 남자가 등장하는걸까. 나는 진짜 손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한국 생활을 다 접고 일단 바다를 건넌다고 하면 어디에 똬리를 틀어야 하나.

 

지난주, 독자 만남에서 한 여인은 "저는 서울에 계속 있어 보기로 했어요. 어디든 내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잖아요." 라고 이야기를 했다. 나도 공감하고 동감하지만 내가 처해있는 '여기'라는 곳이 내 마음가짐을 결정짓기도 하는거니까. 내가 이 곳에서 좀 더 외롭고, 좀 더 갈망하고, 좀 더 본질적이어 지는 것처럼.

 

 

 

(*) 타로 괘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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