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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의 시간


<The Shape of Water>라는 영화 덕분에, 비로소 물의 형태를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처럼 여느 시간과는 결이 다른 어느 특정한 시간 때문에 시간의 형태를 생각해보게 된다.


네모진 다이어리의 네모난 칸칸마다 무언가를 빼곡히 써넣고 계획하고 음미하는 아주 오랜 버릇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 있어 시간은 단연 네모난 칸의 모양이다. 테트리스 블록이 바닥부터 차곡차곡 위를 향해 쌓이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보내는 하루의 형태도 그러하다. 단 하나의 빈틈도 없는 빼곡한 하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씻고 아침을 준비하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정해진 시간까지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또 무언가를 향해 바삐 달려가는 시간. 어제도 퇴근을 하고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다가, 배도 그리 고프지 않았는데 저녁 시간이라는 핑계를 대고 김밥집에 들어갔다. 한 줄도 채 먹지 못할 허기였는데, 김밥에 떡볶이까지 거창하게 시키고는 젓가락으로 접시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불안하게 허비했다. 블록 하나가 또 쌓여야 할 시간인데...하며 김밥과 떡볶이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집으로 가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가야 할 방향과 정확히 반대편인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에 동조했다. 블록 하나를 더 쌓아야 할 시간에 빈틈을 만들고는 불안해하는 나. 블록처럼 단단하고 매끈한 형태가 아닌 이 시간은 어떤 형태일까. 흐느적거리고 물컹물컹하고 끈적거린다. 시간의 블럭과 블럭 사이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다. 집을 지을 때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를 바르는 것처럼, 나의 테트리스 블럭들도 엉망진창의 이 시간 덕분에 비로소 단단해진다. 단단하고 매끈한 형태들만 쌓아올리면 금세 무너질 테니까. 그런데도 나는 이 끈적끈적하고 엉망진창인 시간을 싫어하며, 불안하게 소비한다.


1번 뒤에 2번, 2번 뒤에 3번이 일말의 기다림 없이 착착착 와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면 좋을 텐데. 1번 뒤에 아무것도 오지 않아도 좋고, 1번 뒤에 8번이 와도 좋고, 뭔가가 좀 뒤죽박죽이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울 텐데.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예측 불가능이라서 더 아름답듯, 인생도 예측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즐기는 내가 되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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