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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흔들린다는 것


#. 잘 흔들린다는 것

댐퍼라는 것이 있다. 한글로 ‘충격 흡수기’ 정도로 풀이하면 되려나. 그동안 댐퍼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지난 주 대만 여행의 마지막 날 시간을 쪼개 101 빌딩에 올라 댐퍼를 처음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101 빌딩의 댐퍼가 세계 유일하게 공개된 댐퍼라고 한다. 깎아놓은 밤처럼 참 이쁘게도 생겼다.)

높고 긴 빌딩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댐퍼는 커다란 구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높이는 5층 무게는 600톤 가까이에 이른다. 몇 년 전 대만에 쓰나미가 닥쳤을 때 휘청휘청 흔들리는 빌딩을 잡아준 것도 이 댐퍼다. 얼마 전 올라보았던 롯데잠실타워는 그저 ‘높다’ 는 것 외에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는데, 101 타워는 그 높이도 높이지만 댐퍼를 활용한 스토리텔링과 귀여운 캐릭터가 오래 남아서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쪼개 들른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모든 건물마다 다 있는 댐퍼를 밖으로 드러내고, 캐릭터로 만든 대만의 아이디어가 놀라웠다.

귀국해서 다시 정신없는 일상을 소화하는 가운데, 문득 댐퍼 생각이 퍼뜩 났다. 댐퍼의 존재는 무엇을 반증하나. 약하다는 것, 흔들린다는 것을 반증한다. 모든 높은 건물은 댐퍼를 꼭꼭 숨겨두고 반듯하게 서서 언제나 올곧을 것처럼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하지만, 101 빌딩은 ‘나 흔들릴 수 있어요, 흔들려요.’ 하면서 약점을 밖으로 꺼내놓았다.

마음이 문득 약해질 때, 그래서 작은 바람에도 정신없이 마음이 흔들릴 때 나를 단단하게 잡아줄 나의 댐퍼는 무엇일까. 나는 괜찮은 척, 짐짓 태연한 척하며 댐퍼를 가슴 속에 꽁꽁 숨기는 사람일까, 아니면 건강하게 밖에서 나의 댐퍼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일까. 흔들릴 때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나만의 충격 완충제들은 어디 있을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들린다. 철근으로 지은 건물도 흔들리는데 철하나 들어있지 않은 사람은 오죽할까. 나는 내가 나만의 건강한 댐퍼를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댐퍼를 밖에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구, 오늘은 제 마음이 좀 휘청휘청 합니다’ 하고 누군가의 손과 어깨를 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휘청휘청 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 평생 휘청휘청 흔들릴 텐데 평생 나를 미워한다는 건 어쩐지 좀 슬프고 바보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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