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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8년 3월 3일이 되기 1분전 : 씨리얼

최근 의미있게 본 두 편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모두 씨리얼을 먹는다. <패터슨>의 주인공은 씨리얼로 아침을 열고, <사랑의 형태>의 주인공은 어느 날의 저녁, 이웃의 집에서 씨리얼을 먹으며 함께 TV를 본다. 씨리얼은 유독 손이 가지 않아서 여태 살아오는 동안 기껏해야 두어번 먹어본 게 다인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며칠간 줄곧 씨리얼 생각이 간절했다. 한 통 사볼까. 일전에 씨리얼을 할인 판매하기에 10통 가까이를 사두고는 - 너무 많이 사긴했지 -  '1년이면 다 먹겠지' 했지만 딱 한 번 먹고는 그 뒤 먹지 않았던 일이 있기에 애써 참는다. 끽해야 한 번 먹고 버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

 

아버지의 부재중 전화에는 왠지 응답하지 않게된다. 나에게 아버지는 안개 가득 낀 어스레한 숲길, 한낮에 오르는 가파른 바위산. 가도가도 끝이 없고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존재. 며칠 전 아버지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았는데 정오 무렵이었나, 아버지에게 다시금 전화가 왔다.

/ 별일 없지?

/ 네. 아버지는?

/ 그저 그래.

/ 할머니는 좀 괜찮으신가?

/ 너거 할머니가 올해 팔십 너이다. 팔십 너이.

 

아버지와의 통화는 언제나 짧고 시무룩하다. 보통은 30초를 넘기지 않는다. 오늘은 제법 길었다. 1분 16초. '그저 그래' 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려보았다. 아버지의 '그저 그런' 하루는 어떤 하루일까?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빈 속에 밥을 퍼넣고, 담배를 피고, 마누라의 잔소리로 아침을 열고 일터에 나가고 식당밥을 먹고 저녁이면 다시 마누라의 잔소리와 함께 담배 한 개피로 닫는 하루? 어린 날에는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부재중 전화에도 응답하지 않고, 걸려온 전화는 급히 끊어버리고, 고향에도 자주 내려가지 않는다.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래저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게 된 나는, 내일 씨리얼이나 한 통 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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