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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떤 낱말들의 모임

김주영의 <멸치>_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자리

새가 경계심을 거두고 둥지 근처로 내려앉을 때를 기다리는 외삼촌 곁에서 반듯이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바람만 살아서 윙윙거리는 세상, 어두운 공간과 밝은 공간,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세상과 바라볼 수 없는 세상, 그 한적한 풍경 속으로 섞여 든 햇살과 바람과 나뭇잎 같은 모든 사물들, 석관의 밑바닥에 수천 년 동안 고여있던 시간, 내 조촐한 삶의 이력으로 터득할 수 있었던 공간과 터득할 수 없었던 공간까지, 그리고 상상력의 한계 너머까지 모든 불가사의한 공간들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신비한 자력으로 넘실대는 몽환적 분위기를 경험한다. 그래서 평소에는 비어 있어 적막하기만 하였던 가없는 하늘이 어떤 자력의 기운으로 흐물흐물 용해되었다가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듯한 포만감에 젖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느끼는 침묵과 고요가 내 자신의 부피나 중량보다 본질적으로 더 크고 견고하다는 사실도 알아챌 수 있었다. (p.10,11)


알을 밴 흔적, 누군가를 사랑했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