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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예민함을 팔아 밥을 먹습니다.




'지현씨도 예민해. 글 쓰는 사람 맞아.'


예민하다는 말을, 나를 향한 근거없는 비아냥이나 억측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만 얼마전부터는 나의 당연한 한 부분으로, 적당한 칭찬으로 부러 부풀려 해석해버리기도 합니다. 예민하다라. 


형용사

1 .「…에」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

 

'예민하다'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 같아요. 섬세하다는 것, 센서티브하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거든요. 살면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중, 섬세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민하다'는 나에대한 평가를 후하게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글쓰는 사람은 필히 예민해야만 하기 때문이겠지요. 남들보다 더 많이 더 깊게 더 자세히 보고 느껴야, 뭔가를 계속 써댈 수 있을테니까요. 감각의 촉수를 칼 갈듯이 샥샥 갈아야하는 직업 중의 하나니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을 혼자 은밀히 알아보는 능력은 어릴때부터 타고 났습니다. 누군가의 몇 mm 정도 살짝 자른 앞머리도, 혼자 몰래 맞은 필러도, 좌우를 바꾼 가르마도 모두의 눈을 다 피해가지만 저에게는 딱 걸려요. 이렇게 예민한 사람에게, 갑자기 바뀌어버린 회사의 주소나 출근길의 경로나 가르마처럼 좌우 배치를 바꾼 컴퓨터 모니터같은 것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면. 아아. 


몇 권의 책을 들추며 짧은 글줄을 조심스레 읽어내려가던 아침의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버스-지하철-지하철-버스의 콤보를 감내해내야한다는 사실에 깊은 한숨을 쉬고는, 한숨에 또 깜짝 놀라며 마음을 고쳐먹으려 애를 쓰고는 서둘러 씻고 몇 가지 것들을 챙기고 바쁜 와중에 양말을 신을지 말지를 고민하며 종종 걸음으로 버스정류장을 향해 내달려야합니다. 붐비는 버스. '역시 출근길은 내 인생의 행복을 결정짓는 3대 요소' 라는 사실을 꾸역꾸역 상기하면서, 마음 속으로부터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온갖 짜증과 분노를 지그시 누르면서 다시 지하철. 책을 꺼내서 몇 줄 읽지만 내려야하는 정거장을 지나칠까봐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환승. 계단을 헉헉 대며 오르고 올라타면 다시 버스. 아. 퇴사할까? 이 생각을 수십번 반복하면 새로 이사한 사무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난주 이사의 마무리가 아직 남아 있어서, 오늘은 나머지 물건들을 정리하고 컴퓨터의 좌우배치를 바꿨습니다. 책을 색깔별로 가지런히 꽂아두고, 물건들의 제자리를 잡아주고 유리컵 아래 레이스 티코스터를 깔아주고, 이번주 업무계획표를 짜고 휴가신청서까지 제출 완료. 점심으로 뜨끈한 설렁탕을 먹으러 가자며 우르르 몰려나가는 틈에, 절대적인 고요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혼자 샐러드를 사왔습니다.


'실날같은 희망'이라는 표현에 어울릴법한 실날같은 아보카도의 흔적을 겨우 발견해내고는, 아보카도가 좀 듬뿍 들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아보카도를 인터넷으로 주문했습니다. 작년에 못먹고 썩혀버린 아보카도만 얼추 5만원어치가 넘을텐데 올해는 어째 좀 잘 챙겨먹기를. 


예민함의 끝은 아보카도에 대한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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