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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벗

그래요, 그댄 좀 짱인듯

(사진을 위해 본인이 친히 고기잡수는 포즈를 취해주셨습니다.감사할 따름!)

감기기운을 안고서는 친구와 술을 몇잔마시고 찬바람속을 걸어 집에 왔더니, 그 길로 드러누워 끙끙 거리며 종일 바들바들 떨었드랬습니다. 하루종일 뭘 먹지도 못하고 누워있다가 겨우 기운을 차렸더니 엄마가 R군 송별회에 같이가자 부추기시네요. 마침 모임장소도 집앞의 고깃집이고, 허기진 몸에 보신이나 해줄까 싶어서 쭐래쭐래 따라나섰습니다.

사진속의 R군으로 말할것 같으면, 소위 '엄친아'로서 엄마들 입에 자주오르내리기는 하는데 일반 엄친아들과는 신분을 달리하는 '고품격 엄친아'랄까요? 독서실 CCTV앵글의 위치를 파악해 사각지대로만 다니는 용의주도함을 보이고 있으며, 집과 학교부근 PC방을 몇해동안 장악하여 맹렬한 활동을 펼친 결과로 '나 키보드 좀 두드렸어'하는 님하들의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부모님과 선생님의 속이 행여 평탄할까 싶어, 하루가 멀다하고 두 님하들의 일상에 잔잔한 즐거움과 흥분을 일으키느라 바쁜 나날들을 보낸 엄친아십니다.

1년 반전에 우연히 R군과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어, 그길로 R군의 단골 고깃집에 가서 고기몇점을 맛있게 냠냠 집어먹은 적이 있어요.(R군은 육식주의자로써 1주일에 한번 이상은 꼭 고기를 먹어줘야하는 식성을 지니고 있어요. 게다가 초 일류 미식가임!) 그때 R군이 알바를 하던때라 쿨하게 고깃값을 계산하며 '누나. 다음주에 더 비싼거 얻어먹을꺼예요!'하고 호기롭게 외쳤었는데 '연락하마'해놓고선 쌔까맣게 잊어버린터라 오늘에서야 반가운 재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날 보자마자 날카롭게 외치는 R군의 외마디 '이 야비한 누나!!!!!!' 헉. 야비하다 라는 표현은 글에서도 좀처럼 볼수없는 표현인데 나를 두고 저런 표현을 하다니 고기를 얻어먹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에 사무쳤나봅니다. (군에 간 2년내내 '야비한' 여자로 남기 싫어서 이번주에 육류를 먹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외부세계와 차단된 조직생활은 사람을 극한으로 몰고가는 면이 없지않아 있기때문에, 지금 사주지 않으면 '야비한'단계에서 '비열한'단계로 레벨업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습니다. 면은 배부르지 않아서 싫고, 점심때는 어떠하냐하니 갓 일어난때라 소화가 되지않는다네요. 많은 양을 먹을수있는 저녁이 좋겠다 하여 저녁으로 잡았습니다.)

아무튼 R군이 군대를 간다고하여 모인 사람이 본인을 포함해 열세명. 게다가 평균연령으로 따지자면 어림잡아 50 정도는 나올겁니다. 배고파서 따라나서긴 했지만 그 자리에 슬그머니 앉아있으려니 민망한 구석이 없지않아 있었는데, 좌중을 휘어잡는 R군의 재치에 다들 배를 잡고 쓰러졌습니다. 세시간이 어떻게 간줄도 모르겠더군요.
흘러흘러 듣던 R군의 무용담도 본인의 입을 통해 자세하게 듣게되니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옆에 자리한 R군의 어머니는 가끔씩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넌덜머리를 치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웃고 난리가 났지요. R군의 어머니는 연신 저를 보며 '아이고. 이 일을 어쩌면 좋노'라고 푸념을 하십니다만, 참 잘자란 젊음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슬몃 나왔습니다.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이렇다할만한 사건사고가 없었습니다. 그냥 말잘듣고 학교 열심히 다니는 학생이었지요. 사실 '말잘듣고 학교 열심히 다녔다' 라는 평범한 사실을 반추해보면, 평범한 생활을 위해 얼마나 많은 걱정거리와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던지. 늘 어딘가가 아팠고, 만성적인 신경성 위통에 시달렸고, 지독한 열등감과 경쟁심으로 지낸 날들이었습니다. 늘 비교하고 비교당하고(아직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쿨하지 못합니다 엉엉), 스스로에게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못해 책상에 머리를 찧던 날들이었어요. 누가 뭐라지 않아도 스스로의 인생에 섣불리 '실패'라는 팻말을 걸만큼, 그 무렵의 청춘은 상처입기 쉽습니다. R군의 웃는 낯을 대하니 오늘따라 나의 학창시절이 가엾기도 하였고, R군의 익살스러움(아줌마,아저씨들을 모셔놓고 분위기를 휘어잡을 정도의 입담이라면, 가히 짐작하시겠는지요 후후)과 자신에 대한 한없는 아량이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R군은 나보다 세살이 어린 동생인데 하는 짓이 꼭 애기같아 무심결에 한참을 어리게 보았습니다만, 시간이 지나 오늘 이렇게 마주하고보니 '어쩌면 나보다 많이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누나, 저 군대에 있을동안 결혼하면 어떡해요?'라고 능청을 떠는 R군이, 오늘 이 자리를 위해 모여주신 분들을 위해 한말씀 올렸습니다.



잘자란 그대여. 새로운 도전을 축하하고(대한민국 건장한 남아들에게는 의무이지만, R군에게는 하나의 크나큰 도전이랍니다.) 어디서나 잘 해나갈걸 믿어. 너의 재롱으로 사단장님하를 휘어잡을것을 의심치않아. 군생활에 지쳐 힘들때면 오늘 자리한 아주머니들을 따로 모아 걸그룹 사진을 찍어 보낼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금요일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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