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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나비 지팡이


 



홍삼뿌리라도 씹어먹어야 하나. 피곤에 절어 잠깐 눈을 감았는데 문득 네 살 때 기억이 났다. 나는 초등학교에 딸린 병설 유치원에 다녔는데, 엄마가 하루는 잠깐 어디에 다녀올 모양이었는지 유치원 수업이 끝난 나를 더러 운동장에서 잠깐만 놀고 있으랬다. 나는 빈 운동장에서 엄마를 기다렸는데, 어린 아이의 시간으로 얼마나 많은 혹은 짧은 시간이 지나갔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시간이 참 하염없었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한번도 혼자 집으로 가본 적도 없고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지만, 빈 운동장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보다야 낫겠지. 어린 아이의 판단이지만 지금이라도 난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길가의 어른들이 나를 쳐다보던 시선들이다. 나는 너무 작고 어렸을테고, 그렇게 작은 아이가 혼자 아장아장 보도블럭 위를 걸어서 어디론가 향한다는 것이 그 시절에도 참 이상했으리라. 운이 좋았다, 라고 자주 느끼는데 그 날 누군가가 나를 데려가려 했으면 얼마든지 데려갈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집에 잘 도착했다. 작은 주택에 세들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문 앞에서 오도카니 앉아있으니 주인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곤 뭐라고 뭐라고 하며 얼른 안으로 들인 기억이 난다.




나는 집으로 왔는데 엄마는 계속해서 오지 않았다. 아마 하늘이 어두워져서야 엄마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엄마는 멀뚱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오열하면서 나비 지팡이로 나를 후드러팼다. 늘 그랬듯이 뭘 잘못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죽도록 맞으면서 '집에 괜히 왔다' 라고 후회했던 것 같다. 주인 할머니가 앙상한 손으로 엄마를 뜯어말려서 겨우겨우 사태가 종결된 것 같고 - 그 맘때의 엄마는 한창 젊고 혈기왕성했는데, 꼭 주변에서 뜯어말려야 자식을 후드러패는 행위를 종결했다. 주인 할머니, 수퍼 아저씨, 옆집 언니, 엄마 친구... 다 나를 살려준 은인들이다. 나는 그 무렵에 꼭 어른이 되어서 엄마에게 되갚아줄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쩝 - 나중에 엄마가 마른 울음으로 '여기가 어디라고 어떻게 왔어...' 라고 물어서 '그냥 걸어왔어' 라고 맨숭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엄마는 문득문득 그 때 얘기를 꺼냈다. 쪼끄만 애가 어디라고 그 먼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왔다고. 그리고 꼭 한마디를 덧댔다. 애가 머리가 좋아. 




나는 그 좋은 머리로 엄마를 그다지 속여먹지는 못했다. 나쁜짓 좀 해보려고 마음 먹으면, 그 마음이 어찌나 뜨거운지 심장이 쿵쿵 울리는 바람이었다. 오늘 문득 눈을 감고 그 때 걸었던 길과 나를 쳐다보던 어른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빈 운동장으로 돌아와서 느꼈을 엄마의 황망하고 아득한 기분과, 딸아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날이 저물도록 헤메고 다녔을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져서 문득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아직 아이를 낳아본 적 없지만, 그래서 아이의 의미도 모르고 아무것도 가늠할 수가 없지만, 최근에 아들 100일을 맞은 멀찌감치 아는 한 언니가 썼던 글이 떠올라 적는다. '아이 울음 소리를 들으면 왜 그렇게 좋지. 적막한 시공간이 꽉 메워지는 기분이다.' 



저물도록 나를 찾고 찾다가 마침내 집으로 향하는 엄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가늠해본다. 손가락을 꼽아 보니, 그 때의 엄마가 꼭 내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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