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집으로 걷는데 '바람이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부는 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바람이 좋았다. 그리고 지난해 이맘때쯤 책에서 본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바람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면 사랑하고 있다는거다.
하고 시인이 종이에 대고 말했다. 그 때도 바람이 참 좋다, 는 생각을 했고 당신 생각을 했다. 왜 당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눈 앞에 앉은 사람 대신 살며시 당신을 그려넣어보곤 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어깨 위에 내려앉은 공기가 가볍게 풀썩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자주 웃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드리워진 동그랗고 푸른 나무 잎사귀 밑을 지날 때면 당신 생각을 했는데, 날마다 동그랗고 푸른 나무 잎사귀 아래를 지나다녔으므로 매일마다 당신 생각을 했다.
*
삶이라는 걸 살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툭, 튀어나와서 나를 혼곤히 흔들어놓을 때가 있었다. 여름날의 불국사 내리막을 내달리던 나의 두 다리와 등 뒤에서 조심하라고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와 귓가를 빠르게 스치는 바람같은 것. 중국 광동성의 어느 깡촌에서 며칠을 묵다가 떠나는 버스에 올라 차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나를 향해 두손을 모아 고요히 고개를 숙이던 친구의 아버지. 여덟살의 내가 무척 좋아하던, 버스에 두고 내린 알록달록한 핸드백.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와르르 흔들어보던 화장수가 담긴 엄마의 유리병. 누가 훔쳐가버린 나의 토끼얼굴 지우개. 쭐래쭐래 뒤를 따르며 살며시 밟아보던 누군가의 그림자. 수업 후 자판기에서 뽑아마셨던 실론티 캔. 그런 것들이 나를 살게하고 또 못살게 했다. 아주 작고 여린, 그런 것들을 떠올릴 때면 곧잘 눈물이 맺혔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런 사람이 되었다. 버스에 당신을 태우고 집으로 걷는데 '바람이 좋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눈물이 났다. 조금전 참 풋내나는 영화 한편을 보고 그렇게 울었으면서도 또 뚝뚝 울었다. 매일 매일 생각하던 사람과 걸었구나, 같이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었구나.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었구나. 메로나를 못먹는다는 것과 참외를 싫어한다는 것과 웃을 때 눈가가 예쁘게 접힌다는 걸 알게 되었구나. 어떻게 나와 당신은 줄곧 서로를 잃어버리지 못했을까. 그동안 당신도 나만큼 덜컹이고 덜컥댔을까.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겁나고 겁나고 겁나는 마음들을 디디고 건너온 것일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을 보냈고 아무렇지도 않은 몇 가지를 함께 쌓았다. 같이 거닐고 같이 웃고 같이 뭔가를 마시거나 먹었다. 아주 오래된 드라마의 주제가를 함께 부르고 깜깜한 밤에 피는 그림자를 찾아 돌아다녔다. 이 모든 순간들은 나를 살게하고 또 못살게 하겠지. 무심결에 툭, 튀어나와 나를 온통 흔들어놓겠지. 무심결 앞에서 우리는 문득 힘을 잃는다. 무심결에 당신을 사랑하였고, 당신은 온통 나의 무심결이 되었다.
여전히 (당신의 조금은 이상한 단어 선택법을 따르자면 '아직도')
당신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