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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것

블라인드


집을 옮기면서 가장 비싼 돈을 들이게 된 것이 블라인드다. 그리고 블라인드를 무척 좋아한다.

식구들과 한 집에 살 때는 늘 창에 귀티나고 두꺼운 커튼이 늘어져 있었고, 큰 창이 딸린 방으로 옮겨 지내던 때는 정작 몇 해를 살면서도 커튼이나 그 밖의 어떤 요소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냥 맨숭맨숭한 창문을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창은 컸지만 창 바로 밖이 벽돌담이라 햇살이 쏟아지지 않아 무엇으로 가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겠구나.

작년 여름에 이 집으로 이사왔는데, 새 집을 밤에 보러다니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퇴근 후 바쁘게 밤 아홉시가 넘어 방을 보러와서는 잠깐 방을 보고, 1시간도 넘게 이 방에 살고있던 청년과 까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 방으로 이사와서 지내고 있다.

창으로 햇살이 한 양동이씩 쏟아져서, 빛과 소리에 유독 민감한 나는 새벽마다 잠을 깨어 고민하다가 창틀을 몇번이나 재고 다시 재고 블라인드 제작 업체에도 몇번을 묻고 물어 하얀색의 스크린 겸용 블라인드를 샀다. 그 때의 계산으로는 빔 프로젝터를 사서 방안에 1인용 극장을 만들어 로맨틱한 영화를 실컷 쏘아올릴 계획이엇는데, 어째 영화관을 좋아하는건지 영화를 좋아하는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영화관을 좋아하는 성미라 부지런히 영화관으로 쫓아가는 바람에 빔 프로젝터를 아직 못 샀다.

블라인드를 사고도 설치를 못해 가방 속에 진동드릴을 넣어다니며 일주일 넘게 끙끙댔었다. 블라인드 옆에는 태국에서 사온 모자가 걸려있다. 수상시장에서 저 모자를 바가지 써서 구매했을 때, 그 날 하루 같이 다니게 됐던 일행들이 뜯어 말렸다. 아니, 저걸 한국에 어찌 가져가려고요. 어찌 가져왔고 태국을 잊지 않고 싶어서 잘 걸어두었다. 썩 볼품있는 모자는 아니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블라인드를 다락다락 걷어올리면 햇살이 들어오고 다시 내리면 어두워진다. 가끔은 햇살이 너무 밝아 형광등을 켜두었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아침에 블라인드를 걷어올리면 될 것을 깜빡하고 온종일 형광등을 켜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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