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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매일의 얌,채식

모든 것을 중재하는 카레처럼


배가 고파서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아침부터 떡볶이를 해먹을 요량으로, 잠들기 전 (아마 새벽 세시) 냉동고의 떡을 꺼내두었더랬다. 아, 물에 불려놨어야 하는구나. 아침에 일어나 당장 떡볶이를 먹을 수 없어 대체할만한 먹이를 궁리했다. 어느 학자가 말했었나. 인간의 뇌는 끼니를 궁리하며 비약적으로 발달했다고. 어쨌거나 배고픕니다, 삐약!

카레, 카레다! 며칠전부터 서촌의 '하와이 카레' 라는 식당에 가보고 싶었는데 그 욕구가 작동한 것인지 오늘 아침은 왠지 카레다. 마침 카레 가루가 있어 카레 가루를 따스운 물에 살살 풀고 불려둔 검정콩과 병아리콩을 넣었다. 꼭 필요한 것을 뺀 나머지를 다 갖춘 자취녀라서 설탕, 소금이 없더라도 월계수 잎사귀와 큐민같은 향신료는 갖추고 있기에 병아리콩도 있는 것이다. 물론 카레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감자, 양파, 당근 따위는 있을리 만무하다.

유황처럼 펄펄 끓는 냄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콩을 보자니 어째 말간 어린이들에게 세계정복을 맡긴 양 기분이 안쓰럽다. 아무리 카레가 모든 재료를 아우르는 마법의 향신료라도, 뭐가 있어야 마법의 맛이라도 볼 것 아닌가. 일단 쌀 반컵을 흩뿌려 넣었다. 그리고 보자, 바나나를 넣을까말까  고민하다 비겁하게 바나나의 단 맛에 의지하기 싫어 넣지 않았다. 분명 넣으면 난데없이 맛있어질테지. 어제 삶아둔 닭찌찌가 남아있어서 잘게 뜯어넣고, 냉동실에 삶아 얼려둔 단호박 한 통을 다 넣었다. 뭐든 없는듯 하면서도 묘하게 뭔가가 있는 자취생이다.

우왓. 엄청 구수하고 근사한 맛의 카레가 탄생했다. 검정콩이 익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다음번엔 - 감자와 양파를 준비하는게 어떠냐 - 한번 삶아서 넣으면 더 좋을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단호박을 골라내며 먹고 있었는데, 나는 역시 호박을 싫어하는구나를 절감했다. 얼마전에 단호박을 10킬로 그램이나 샀다. 작년에도 똑같이 그 짓을 했다가 하나도 안먹고 썩혀 버렸으면서 왜 나는 스스로를 호박 애호가라고 줄곧 믿어왔을까. 내심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가 부러웠던걸까. 엄마가 수제비나 국수 삶을 때 꼭 넣던 애호박이 그렇게나 싫더니, 커서도 애호박이건 단호박이건 딱 질색이다. 그런데도 또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 범벅은 환장하게 좋아하니, 나는 늙스구레한 것만 좋아하는 변태 호박 애호가다. 그러나 저러나 아주 옛날부터 궁금해왔던 것인데 왜 호박에만 나이가 있을까. 늙은 오이, 애사과는 없는데. 그리고 젊은 호박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호박은 애 아니면 영감의 시절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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