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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매일의 얌,채식

대범한 청경채 볶음


횟집에 가서 회보다는 샐러리를 입에 욱여넣을 정도의 초식 인간이었건만, 그래서 토깽이 혹은 햄스터(햄스터는 육식아닌가? 갓낳은 지 새끼를 물어뜯어 먹는걸 봤다) 라는 서브 별명을 가지고 있었건만 야채의 맛을 잊은지 한참 되었다. 사회 생활하면 역시 육식 아니던가! 궁핍한 초록은 홀랑 잊어버리고 목요일의 양꼬치, 눈오는 한낮에 맛보는 두툼한 함박스테이크, 홍대 모퉁이에서 자글자글 구워먹는 돼지 목살에 흠뻑 빠져 지냈다. 그뿐인가! 구불구불한 생선 내장이 듬뿍 들어있는 알탕과 비오는 이태원의 연어 스테이크는 어떠했던가! 두달째 직장생활을 쉬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잘먹고 다니니 냉장고의 안부를 물어볼 틈이 없었다.

집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도 있지만 밥하고 뭐하고 덜그럭 거리는게 귀찮아 대에에충 때우기 일쑤. 잘 쓰지도 않던 전자렌지를 이렇게 폭발적으로 쓰게될 줄이야.

그러다가 문득 오늘 아침 라는 단식에 관한 책을 읽으며 식욕이 동해 - 어찌된 영문이신지요 - 밥을 짓고 냉장고를 열어 마땅한 식재료를 살펴보았다. 음. 떡볶이떡, 치즈 케이크, 아이스크림, 떡볶이떡, 치즈 케이크, 아이스크림, 떠... 어찌 떡볶이 재료와 그 후식 밖에 없단 말이냐. 떡볶이로 점철된 영혼같으니! 아, 저기 경채, 경채가 있다! 아는 언니가 생협에서 야채를 15만원 어치나 샀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고 부러워하면서 며칠전에 나도 실한 청경채를 사본 것이다. 살만한 야채가 별로 없었다. 어찌 사면 15만원 어치를 살 수 있지. 언니는 정녕 봄날의 화사한 원피스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것일까. 문득 얼마전에 언니와 밤산책을 하다가 인적드문 산길에서 몇대 얻어맞은 것이 생각났다. 별안간이었다. 영문도 몰랐다. 언니 앞에서 야채와 원피스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을 꺼냈다간 또 얻어맞을 수 있기 때문에 묻지 않아야지.

아, 아무튼 떡볶이의 여집합인 경채가 있어서 다행이다. 청경채 볶음을 만들어볼까나. 청경채 볶음은 정말로 손쉽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대범한 요리다. (요리라고 할 것 까지도 없지만!) 잘 달아오른 냄비에 물기 촉촉한 청경채를 양껏 팟! 넣으면 순식간에 냄비에서 소나기가 피어오른다. 기세좋게 비오는 소리가 나는데 여기에 간장, 고추장, 고춧가루, 참기름을 취향껏 넣어주기만 하면 끝.

기세좋은 청경채 볶음을 만들면서, 냄비 안에 내리는 빗소리에 흐뭇해하면서 사노 요코 할머니의 책을 뒤적거렸다. 나는 대범한 청경채 볶음을 만들었다!

창밖에 새소리가 들린다. 워낙 곱고 청량해서 창문에 바짝 붙어 두리번 거리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전에 고모가 돌아가셨다. 엄마 말에 의하면 고모가 돌아가신 그 다음날인가, 처음 보는 아주 예쁜 새가 날아와 떠나지도 않고 한참을 서성이다가 갔단다. 엄마는 그 새가 고모임을 직감했다고 했다. 고모가 늘 엄마에게 "죽으면 훨훨 나는 새가 되고 싶어." 라고 했단다. 천주교인은 환생을 믿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장난삼아 이죽거렸다. 엄마는 아무 대꾸 하지 않았지만 세상엔 이론에 끼워맞출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잖은가. 애당초 이 거대한 가능태를 어딘가에 끼워넣는다는게 가당찮키나 한 일인가.

계속되는 새소리. 고모는 아닐 것이다. 나는 고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고모 역시 나에게 별 스런 감정이 없었으므로. 저 새는 누구의 목소리일까. 청경채 한그릇 놓고는 별별 생각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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