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고향집. 혼자 덩그러니 바닥에 등을 지지고 있다가 일어나서 티비를 켰다. 자취방에는 티비가 없어서 한번씩 고향에 내려오는 날이면, 무슨 이장님 집에 티비보러 모인 애기들 마냥 무릎 딱 꿇고 정자세로 티비를 봤는데 요즘은 볼 것이 없어 영 시들하다. 줄곧 먹고 먹고 먹고 또 먹는 연예인의 입천장이나 그 연예인의 아기, 그도 아니면 가수가 되겠다고 무대 위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린 친구들.
어제 운좋게 오늘 올라가는 표를 하나 구했는데, 새벽부터 일어나 동동거리기 귀찮고 또 구할 수 있을거라는 마음에 취소를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못 구하고 있다(아뿔싸) . 명절이면 그 빽빽한 서울 도심이 훌렁 텅 비어버리는데, 그럴때마다 도대체 서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건지 새삼 실감이 난달까. 서울 살이에 지쳐 귀향이나 귀촌을 꿈꾸는 자들도 주변에 더러 있는데, 그걸 막연히 '패배'라거나 그 비슷한 무어라고 단정지을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을 가장 치열하고 절실하게 하게 되는 때가, 나의 경우에는 신도림역 지옥철 출퇴근 길이었니. 내가 한때 푹 빠져있던 인근 동네의 가수분도 올 3월 제주도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으며, 마음으로 존경하던 어느 출판사의 편집장 분도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 부인되는 분이 '돈이 시간이 여유가 넘쳐서가 아니라 지금, 철저히 여기에 살고 싶어서 고민 끝에 결정한 일' 이라는 글을 써둔걸 봤다. 공감 퓨어 100.
어제밤 가족 중의 누군가가 늦은 치킨 파티를 했는지, 반쯤 남은 치킨이 포장 박스에 담겨 있어서 식은 치킨을 씹어 먹으며 컴퓨터를 켰다. 딱히 컴퓨터 켤 일이 없어 핸드폰으로 몇 장의 사진이나 글을 끼적이곤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컴퓨터 모니터로 확인하니 사진이 과하게 커서 깜짝 놀랐다. 브런치에서 벌써 3주째 글을 올리지 않고 있다. 안되는데. 역시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꾸준히 쓰는 것이다. '프리랜서가 프리할 때는 일이 없을때 뿐' 이라는 조경규 작가의 말처럼, 나는 아마 회사의 9 to 6 시스템(늘 야근이긴 하지만)에 잡아두지 않으면 어디로 날아가버릴지 모르게 될 것이야. 손이 큰 어머니라서 냄비마다 먹을 것이 언제나 그득그득 넘쳐흐르니, 눈에 보이면 그냥 먹고 보는 나는 집에 있으면 종일 먹는다. 혼자 살 때의 몇 배를 먹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쓸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를 가득히 좋아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며 아주 단순한 사실을 이러저러하게 복잡하고 어렵게 잔뜩 꼬아놓은 것은 결국 우리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슬퍼졌다. 마치 <빅쇼트>의 어쩌고 저쩌고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문득 버스에서 어떤 웹툰의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많이 아픈 엄마가 딸(작가)에게 '많이 표현하고 살아. 참지 말고.' 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유명한 웹툰도 아니고 작가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 웹툰에 등장하는 작가의 남편과 딸 아이 이름으로 열심히 검색을 했으나, 그런 걸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만 기억하는게 더 이상해!) 찾는데 애를 먹었지만 결국 찾아냈다. 많이 표현하고 살아, 참지 말고. 끄덕끄덕. 어떤 책에서 본 글귀도 갑자기 떠올랐다. '인생 최고의 사치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이라는 말. 밤하늘의 별을 들여다보는 것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온종일 생각하는 것도 사치인 시대. 사치의 획득을 위해서 누구나 기어이 제주도로 내려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자기전에 누군가에게 살면서 처음으로 먼저 좋아한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중학생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불킥이나 한 번 하고 자지 뭐. 늘 상대방의 감정을 담보로, 확인된 안전성 앞에서만 나도 내 마음을 (다는 아니고) 슬쩍 드러내면서 '나도 좋아해' 를 고수해 왔었는데, 그동안의 세월동안 용감함이 켜켜이 쌓인 것인지 아니면 찐따력이 상승한 것인지 둘다인 것인지 이도저도 아닌 것인지. 어제 보름달이라도 떴었나... 어쨌든 용감한 찐따짓을 하고나니 희한하게도 마음에 동그란 구멍이 뽁 뚫려서 거기로 바람이 쏴쏴 들어오는 느낌이 났다. 심지어 이 청량감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어서 진짜로 구멍이 난 건 아닌지 궁금할 지경. 어차피 잃어버릴, 아니 이미 잃어버린건데 용감하게 잃어버려야지라는 뒷수습의 자세. (근데 어느정도 찐따같은지는 상대방한테 한 번 물어보고 싶긴 하다. 연락하지 말랬는데 굳이 연락해서 좋아한다고...이건 마치 구남친의 '자니?'와 같은 급일까. 이불 어딨어.)
치킨을 우적우적먹다가 문득 사순시기의 시작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니 오늘이 사순시기의 첫날이다.
재의 수요일은 교황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1세(재위 : 590∼604)에 의해
사순절의 첫날로 성립되었고, 바오로(Paulus) 6세(재위 : 1963∼1978)는
이날 전 세계교회가 단식과 금육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한국에서도 만 21세부터 만 60세까지의 신자들은
하루 한 끼 단식하며 만 14세부터의 모든 신자들이 금육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2016년 2월 10일 수요일이 사순시기의 첫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2016년 2월 10일은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이어서
금식재와 금육재를 의정부 교구와 군종 교구는 관면을
서울대 교구와 대구 대교구, 부산교구도 12일로 이동했으며,
대전교구는 재의 수요일 금식과 금육을 그대로 실시하되
부득이하게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는 12일에 지키도록 했습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miho100424/220620929968)
교황님이 단식과 금육하라 명하셨거늘, 연이은 과식에 아침부터 치킨까지 잘 먹었... 12일로 이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상바오로 신부님께 사순기간동안 기도를 부탁드렸는데, 오늘부터 40일간 나도 차분하게 기도를 해보고 싶다. 매일 무언가를 빠뜨리지 않고 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이 드는 일이구나, 싶기도 하고. 3월 27일이 부활절이네. 40일 뒤에 원피스 입을 생각만 번쩍 드는거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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