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alon de alone/어떤 낱말들의 모임

김영하의 <보다>_ 이제는 탐침을 찔러넣을 때

 

 

 

 

새해 선물로 내게 책을 사줬다. 뭐 별다르게 '새해 선물'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아도 책은 여전히 사고 있지만, 그래도 의미있게 새해 시작에 맞춰 3권 세트의 비닐포장을 기분좋게 뜯었다. 올해는, 아 작년이구나. 지난해에는 알라딘 이라는 사이트에서 대부분의 도서를 구매했는데, 한해의 끝자락에 이르자 1년동안 구입한 책의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마포구에서 상위 0.7퍼센트의 도서 구매력을 자랑하는, 그러니까 나름 상위 1%의 독자였고 구입한 책은 백권 남짓. 알라딘에서만 책을 구매한 것이 아니므로 어림잡아 130권 정도 구매했을 것이라 추산한다. 다 읽었냐고? 내 책장에 아름답게 꽂혀있다.

 

 

요즘은 책을 좀 읽는다. 직업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 내공이 후달달 딸려서 - 직업이 사라진 당분간의 지금은, 시간이 넘쳐나고 천성이 게으른 탓에 겨우 책이나 들출 수 있기 때문이다. TV가 있었다면 아마 온종일 채널 하나를 틀어놓고 붙박혀서 해가 지는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을텐데, 다행히 TV가 없고 같은 이유로 인터넷을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게으른 자는 씻는 것조차 힘들다. 그렇다면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엄두도 못낸다. 영화를 무척 좋아해 영화를 보러 바깥에 나가는 일은 기꺼워 하지만, 그것도 우스운 것이 고작 깜깜한 공간에 갇혀 푹신한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싶어서, 그러니까 서로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그 깜깜한 두 시간을 안온하게 점령하기 위해서 씻고 바르고 단장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영 달갑지만은 않다. 쩝. 아마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나는 자발적 히키코모리가 되어 방에서만 너끈하게 몇 년은 버텼을테다. 아, 아무튼 천성이 게으른 자의 집안에서의 선택지는 두 가지 밖에 없다. 노트북을 켜놓고 안에 들어있는 영화목록을 뒤적이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책을 펴는 것. 나는 머릿 속으로는 '아 뭔가 움직이는 것을 좀 보고싶은데' 하며 영상을 갈망하면서도, 눈으로는 책장 위에 꿈쩍없이 붙박혀있는 글자들을 하나하나 따라간다. 읽는 것이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책을 내려놓으면 노트북을 켜고 영화 목록을 뒤지고 영화를 섬세하게 초이스하고 온 방의 불을 다 끄고 뭔가 영화에 어울릴만한 적당한 마실 것을 고민하는 일련의 과정이 썩 귀찮기 때문에 여전히 책을 쥐고 있다.

 

 

"한동안 나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다. 소설가가 원래 그런 직업이라고 믿었다. 국경 밖에서 가끔 전파를 송출해 나의 메시지를 전하면 그것으로 내 할 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2012년 가을에 이르러 내 생각은 미묘하게 변했다.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잠을 자다가 저녁부터 일어나 김영하의 <보다>를 읽었다. 소설가 김영하가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보고 느낀 여러가지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사실 사회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번잡스럽기 때문이다. 택시가 어쩌고 저쩌고, 노동자가 어쩌고 저쩌고, 건축학개론이 어쩌고 저쩌고... 그가 '인간이라는 작은 지옥'이라고 우리의 내면을 일컬은 것처럼, 이미 이 거대한 사회의 미개한 한 일원인 우리는 이미 지옥 속에서 내면의 지옥을 또 각자 품고 충분히 부대끼고 있지 않은가. 번잡스럽다. 모든 것이 번잡스럽다. 문학은 이 번잡함으로부터 나를 좀 탈출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이라고 스스로를 일컬은 것처럼, 그 역시 이 모든 번잡함으로부터 '우아하게' 한 발 비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옥문을 두드린다. 똑똑. 그리고 지옥의 면면을 살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한번도 '작가'라는 직업을 내 삶에 들이려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작가는 글을 쓴다.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그래야 그 글은 효용가치가 있다. 나 좋자고 매일 꾸준히 일기를 쓰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다. 작가가 쓰는 글은 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독자에게가서 와닿아야 한다. 나는 번잡한 인간사에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아주 어릴때부터 지독한 환멸을 느껴왔다. 인간은 좋아했지만 인간들이 벌이는 인간사는 싫어했다. 이미 일상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아주 피곤했는데, 그 피곤함의 여백을 비집고 기어이 또 다른 피곤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납득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며 분개하고 질질짜고 웃었으며, 이도 모자라 자기 전엔 라디오를 들으며 또 웃고 울고 질질 짰다. 맙소사. 이 모든 것이 극도로 피곤했던 나는 드라마와 라디오를 멀러했다. 이렇게 멀리해도 맨날 누군가는 내 앞에서 속내를 다 끄집어 놓아 풀어헤쳤다. 거참, 모든 사람으로부터 귀를 닫고 싶어하는 이에게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재능이 있을 줄이야.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에 분개하면서 드라마와 라디오를 피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입술만 달싹여도 나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달아나기 바빴다. 못 알아듣는 척을 했고 공감하지 못하는 척을 했지만, 이미 내 깊은 곳에서는 그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절해했다. 그들도 빠르게 알아차렸다. 내가 결코 그들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군가가 나의 글,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결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알량한 행위도 이제는 서서히 그 경계를 지워가고 있다. 요즘은 책을 좀 읽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야기 하고 싶다면 먼저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여전히 드라마와 라디오는 가까이 하지 못하겠지만, 가까운 누군가들의 이야기는 좀 더 열심히 들을 준비가 되있다. 예전에는 그들의 속내 앞에 '우아하게' 비껴나있고 싶어했다면, 이제는 나도 좀 더 그대들의 면면을 살피고 껴안을 것을 약속한다.

 

 

글 쓰지 못하면 어떤가. 어쨌든 좀 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될테니까. 그걸로 만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