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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떤 낱말들의 모임

윤성근 <내가 사랑한 첫 문장>_ 어쨌든 삶은 계속된다

 

 

 

 

 

나는 본디 소설을 싫어한다.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삶에 대한 피로도 때문이다. 이미 내 삶만 하더라도 매일매일 꼬박꼬박 스물네시간을 풀로 방영하고 있는데다 - 꿈에서도 뭔가는 계속된다. 더욱 극적으로! - 피해갈 수 없는 이런저런 인간관계들의 삶까지 더해지고 있지 않은가. 작게만 봐도 회사 상사와 동료와의 이런저런 트러블, 연인과의 감정싸움, 부모와의 갈등, 일회성 술자리에서의 적당한 비위 맞추기와 뒷담화까지... 피로하다. 이미 피로도가 만땅인데 뭘 또 굳이 가상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본단 말인가. 가상 인물들도 이런저런 갈등을 겪고, 사건을 맞이하며,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절망한다.

 

 

저자가 운영하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대해서는 몇 년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아는 출판사 대표님이 가끔 거기서 행사도 하고, 이런 저런 연유로 초대해주셨는데 시간이 안되기도 했고 - 낼려면 굳이 낼 수 있는 시간이지만 - 솔직히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이름이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죄송!) 어쨌든 이 책, 진짜 재밌다. 저자의 필력이며 책에 대한 박학다식함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술술 읽어가다가 책을 다 끝내자마자 '이야기'가 더 읽고 싶어 방안의 책을 샅샅이 뒤졌는데, 당연한 노릇이지만 소설이 단 한권도 없었다. 절망했다. 고전문학전집 한 질을 사다놓고 매일매일 읽고 싶은 욕구를 처음으로 느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서 어제는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러 이런저런 책들을 싹 흝어보았는데,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아무래도 몇 년전 책이라 필력이 이 책만 못하고, <침대 밑의 책>도 이번만큼 맛깔나게 책 이야기를 풀어내진 못했다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은 <책이 좀 많습니다>였는데, 이건 도서관에도 없고 중고도 없어서 아마 새 책을 사봐야 할 것 같다. 궁금해.

 

 

저자의 말대로 작가들은 '이야기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할 이야기가 없으면 '나는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다. 한달에 너덧편 써내는 잡지 원고에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밤잠 못자는 괴로움을 겪는데, 책 한 권을 써내는건 얼마나 큰 괴로움일까. 배부르고 시간남아서 펜을 든 사람은 결코 없다. 다들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겨우겨우 펜을 든다. 책에서 소개한 저자들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글을 쓰다 죽기도 했고, 평생을 빛을 보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괴로움에 자살하였으나 죽어서 빛을 보게 된 사람도 있다. 다들 그토록 괴로운 상황에서 뭘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걸까. 결국 그들은 삶 속에서 삶을 이야기했다. 소설의 인물들을 빌어 삶의 다양한 국면을 이야기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괴로운 종말을 맞기도 하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머쥐기도 한다. 어쨌든 그 인물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간다.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작가가 그들에게 부여한 삶이니까. 독자들은 작품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들춘다. 용기를 얻기도 하고, 함께 아파하기도 하고, 쓸쓸한 종말에 분노하고 탄식도 해가면서 자신의 삶에 다른 인물의 삶을 들여놓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올곧게 집중하고 쏟아붓는 것만이 삶에 주어진 모든 미션을 수행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듯 싶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에 다른 이의 몫을 남겨놓을 때, 자신의 삶에만 두던 시선을 다른 사람의 삶에 넌지시 던질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갖게 된다.

 

 

작가들은 모두 삶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하나같이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이의 삶에 귀 기울일 줄 알았고, 이런저런 삶을 힘겹게 노래하였다. 그들은 죽는 날까지 글을 쓰며 그 글을 읽는 당신이 좀 더 열심히 삶을 살아가기를, 좀 더 열심히 삶을 사랑하기를 말없이 응원했던 사람들이다. 주말에 책을 한 권 빌렸다. 조르주 페렉의 <어느 작가의 오후>. 조르주 페렉은 별에 자기의 이름이 붙은 작가다.

 

 

나는 이제야 겨우 귀 기울일 용기가, 여유가 생긴 것일까.

결국에는 내 삶을 좀 잘 살아볼, 잘 살아보고 싶은 이유같은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