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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 2003년산 영화 <원더풀 데이즈>. 포스터는 나중에 수정되었다.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분명하게 기억하는 카피 하나가 있다. 아주 가끔,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원더풀 데이즈>라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포스터에 쓰여진 카피였는데, 영화는 정말로 눈이 부시도록 말아먹었다. 포스터처럼 구름 뒤편으로 사라졌다. 나도 아마 이 멋드러진 포스터와 카피가 아니었으면 진즉 기억에서 지워버렸을거다. 2003년, 이 포스터를 보자마자 너무나 반해서 어딘가에서 한 장을 구해가지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여다 본 걸로 기억한다. 오로지 이 포스터에 너무나 심취해서 정말로 영화로 대한 궁금증은 하나도 일지 않고

 

 

아주 가끔,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종일 그러고 싶을만큼.

 

 

살면서 아주 가끔,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은 의외로 그리 흔하진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어떤 날의 구름은 더러 있었지만 아주 가끔씩 들어있는 구름은 아니었으니까. 

 

 

 

 

 

 

시간에 쫓기자 친구가 신도림까지 태워준다. '야 횡단보도에 16초 남았다 얼른!' 친구의 재촉에 으어어어어. 두 손에 짐을 들고 허둥거리다 친구가 안전벨트까지 끌러주자마자, 나는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신호등 하나를 건너보겠다고 우다다다다 차를 박차고 나왔다. 4.3.2.1. 아 실패. 

 

 

문득 하늘을 보는데 어. 

 

 

이 하늘. 원더풀 데이즈다. 

 

 

아주 가끔,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거짓말처럼 빌딩 숲사이로 비행기가 유유히 지나간다. '어 내 친구다!' 낮은 시력에도 햇살에 반짝 빛나는 비행기의 잘빠진 하늘색이 또렷하다. 이렇게 아주 가끔 눈부시게 맑은 날, 비행기가 빌딩숲 사이로 슬쩍 나타났다 사라지다니. 그것도 꽤 가깝게. 포스터랑 똑같아! 사진을 남기고 싶어 얼른 비행기의 자취를 쫓았는데 금세 사라지고 없다. 내 친구 곧 직장이 저기구나. 일을 하는 과정이 뚜렷하게 멋있는 직업이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보통 일을 하는 과정은 본인 혹은 내부의 동료들만 공유가 되는데, 비행기를 운전하는 건 과정 자체가 예술이구만. 시간에 쫓긴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고 신도림역에서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곁을 지나던 어떤 여자가 '야 오늘 구름 진짜 예쁘지?'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눈부시게 기분이 좋아져서 함빡 웃는 얼굴을 하고 부동산으로 갔다. 보여준 집들이 다 엉망진창. 일쩜오리터 페트병에 가득 담긴 꽁초와 퀴퀴한 냄새와 어지럽게 널려진 쓰레긴지 옷가지들이 뒹굴고 있는 홍대 근처의 방 두 곳을 봤는데도,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날씨가 너무 좋아서 평소보다 유독 예뻐보이는 거리의 얼굴들에 마음이 쿵닥쿵닥. 부동산 아가씨가 나를 하루종일 이끌고 다녀줬으면 싶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너무 너무 좋아서.

 

 

 

 

 

 

 

 

부동산 아가씨와 어느 길 위에서 헤어진 뒤로도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 씌여진 아 라는 또렷한 글씨를 발견.

 

 

 

누가 내 감탄사를 대신 하늘에 새겨넣었나.

 

 

 

 

날씨좋다

 

 

 

 

* 이 사진과 글을 얼굴책에 올렸더니 다들 '오늘 날씨 정말 좋아요' 라는 들뜬 대답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기만해도 두근거린다.

 

 

아주 가끔,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