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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급한 일이야, 전화 좀 줘.


몇년간 연락이 뚝 끊긴 선배가 얼마전부터 연락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 연락두절의 초기에는 내가 의도한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선배와 몹시 사소한 일로 격렬하게 다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선배는 그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않게 되었고, 나도 처음에는 궁금해 하다가 으레 그러하듯이 선배를 잊었고 그러다가 다시 연락이 된 것이다. 뭐랄까. 몇년이 흘렀건만 선배의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그때의 격렬한 다툼을 떠올렸는데, 선배의 기억속 우리의 관계는 항상 원만한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나보다. 아주 조그만 일을, 상대방은 벌써 잊었는데 혼자 잊지 못하고 있을때의 열패감이란. 그렇다. 난 이런 인간인가보다.)

가끔 걸려오는 선배의 전화를 자주 받지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선배가 전화를 하는 시각은 주로 밤 열한시나 열두시 부근인데, 그 시각이면 드라마-주로 선덕여왕-를 보거나 자거나 했기 때문이다. 지난주였나. 드라마를 보고 방으로 들어와 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 두통과 문자가 와 있었다. 같은 사람의 것이었다. '급한일이니 꼭 전화해 줘.' 밤 열한시가 넘어 걸려온 전화와 문자.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갔고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야. 넌 인생에 진정한 친구가 몇명있냐?' 허탈했다. 급한 일 = 진정한 친구찾기. 그렇다. 전화를 건 이가 다른 사람같았으면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선배는 늘 그런 공식이 통하는 사람이다. 망각하고 있었군. 진짜 친한 친구는 두명인것 같다 는 말을 하며, 그 두명과 나와 연락이 끊긴지가 한 손으로 꼽아도 모자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조금 계면쩍어 했던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나대로 바빴고, 지들은 지들대로 바빴을터이니.

어제도 세통의 부재중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항상 부재중인 나를 붙들고 선배는 급기야 의심을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정말 드라마를 보았느냐고 연거푸 묻는통에 선덕여왕의 어제 줄거리를 줄줄 말해야 했다. 선배는 선덕여왕을 보지 않기에 어떤 줄거리를 말하든 상관이 없긴 하지만.
어제의 논제는 이것이다. '삶은 무엇이냐?'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밖으로 지나는 리어카에 '삶은...계란'이라고 씌인 문구를 보았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꽤 한참전에 유행하던 것이고 엔알지 노래중에 같은 제목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삶은...계란도 될 수 있고 고구마도 될 수 있고 밤도 될 수 있잖아요 하고 말하지 않았다. '선배는 삶이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는...삶은 무엇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많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오고갔지만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고 선배의 결론은 <1. 삶은 무엇이 될 수 없다. 2. 그러니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자체에 오류가 있다. >이다.

또 이야기가 한참을 오갔다. 꿈을 물었더니 선배의 꿈은 신神이라고 했다. (선배의 미니홈피에 신이 되고싶다는 글이 적혀있긴 했지만, 이렇게 본인의 입으로 다시 한번 듣게되니 묘한 감정이 일었다.) 신이 되면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란다. '신이 되어도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모르면 어떡해요?' 라니 그런건 없단다.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알게되면 삶에 대해서도 알게 될 거란다. 나는 어디선가 읽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선배, 한알의 모래 알갱이안에 우주가 있다 그랬어요. 그러니 저 멀리 잡히지 않는 우주에서 찾지말고 모래알갱이에서 찾는게 어때요?' '오 멋진데? 근데 그게 왜 그런건데?' 나는 마구 주절대었다. '그러니까, 우리눈앞에 있는 한알의 모래알갱이가 어떤 시간과 공간을 거쳤는지, 그 모래알갱이가 품고 있는 무수한 기억들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게 없잖아요. 모래알갱이가 처음에는 어떤 형태였는지, 무엇과 무엇을 거쳐 지금의 이 형태가 되었는지. 그리고 나중에는 어떻게 될건지. 우리는 한알의 모래 알갱이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게 없단 말이예요.' '흠...' 선배는 작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러니까 우리 눈앞에 있는 한알의 모래 알갱이를 비로소 알게되면, 그때 우주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 멋진데?' 선배가 멋지다고 칭찬을 한다. 멋지긴 뭐가 멋진가. 내가 생각해도 개소리를 주절댄 것 같다. '한알의 모래 알갱이 안에 우주가 있다'라고 했던 그분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부터 선배는 아마 주변에서 모래 한 알을 집으로 데려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것 같다. 다음 논제는 또 뭐일런지. 현대판 소크라테스와의 통화는 늘 나를 고롭게 한다.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중략)

<Auguries of Innocence> By William B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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