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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마실/오래묵은 로망, 태국

첫째날 : 납치녀 등극

 

 

 

 

 

 

 

 

공항에서 주는 표 받아서 비행기 타는건 누구나 할 수 있는거니까요. 지금 태국이 한창 성수기라 항공권이 좀 비싸서, 조금이라도 아껴보고자 베트남 경유를 택했습니다. 경유를 하니 밥을 두 번 주더군요! 앞으로도 왠만하면 경유하려구요. 인천 → 하노이 구간의 기내식은 그냥 저냥이었는데, 하노이 → 방콕 구간의 기내식이 정말 황홀합니다. 마치 방콕에 온 것을 하늘에서부터 환영이라도 하는 양!

 

참. 저는 지난 달에 잠깐 대만에 머무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리고 캐리어에 여름옷만 꽉꽉 챙겨왔음에도, 왜 베트남부터 덥다는 생각을 못했을까요. 경유를 위해서 하노이 공항에 대기 중일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반팔 혹은 민소매에 슬리퍼 차림이었습니다. 흑흑. 여름옷을 죄다 수화물로 부쳐버린 저는 베트남에서 땀을 흘리며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그 스웨터는 방콕에 도착한 첫날 밤을 땀으로 아름답게 장식해주고 있었...

 

수완나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든 첫번째 생각은 '아! 내가 정말 태국에 왔구나.' 였고, 그 다음은 '이제 어디로 가지?' 였어요. 정말 어디로 가지? 일단 제가 태국에 온 단 하나의 목적이 '카오산 로드' 니까, 카오산 쪽의 한인 숙박 업소에 가겠다고 말은 해둔 상태였거든요. 그 쪽으로 가야지. 글씨는 꼬불꼬불. 일단 공항철도 타는 곳으로 가서 우물쭈물 거리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파야타야 역까지 가고 싶어요!'

 

한 명은 영어를 전혀 못한다고 하고, 음 그때 한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하네요. 알고보니 타이완 사람. 둘다 영어로 이야기 하다가, 타이완 사람인걸 알자마자 반갑게 중국어를 쏘아댔습니다. 그 친구도 무척 반가워하더군요. 공항철도를 타고 가면서 그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게이인줄 몰랐어요. 언어의 뉘앙스나 몸짓이 여성스러워서, 그저 머리가 짧은 여자인줄 알았거든요. '보이 프렌드' 이야기도 계속하고. 게이인건 며칠 뒤에 알았습니다.

 

 

 △ 이 놈의 스웨터

 

카오산은 위험하다는 그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태국에 온 이유는 카오산에 가기 위해서야! 다른 건 의미없어!' 라며, 혼자 굳이 카오산을 가겠다고. 숙소 주소도 모르면서. 구글맵도 사용 못하던 때라, 일단 역에 내리자마자 몰려드는 모든 호객꾼을 거절하고 택시를 세우고는 '미터!' 라고 노련한 여행자인척 했습니다. 여행 책을 살짝 봤는데 무조건 미터를 켜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어디로 가냐는 말에, 사진 한장 보여주면서 '여기요...' 라고. 하하하. 그 사진 속 건물 이름이 파수만 요새 였어요. 그것도 나중에 알았지만.

 

와. 한밤중에 방콕시내를 택시타고 달리는데 기분이 좀 이상하드만요. 새벽까지만 해도 엄청 추웠는데 갑자기 여름이라니. 귓가를 때리는 여름 바람을 느끼면서 한참 감상에 젖어있는데 택시 기사 아저씨가 다 왔다고. 오! 진짜 사진 속의 건물과 똑같은 건물이 눈 앞에! 여기서 또 한 번 감격에 젖었습니다. 내가 진짜 왔어... 왔어...

 

 

△ 사진 속의 그 건물 앞에서. 감격이 뙇!

 

몸은 땀에 쩔었지, 캐리어는 무겁지. 택시에서 거의 캐리어와 함께 구르듯이 내렸는데 마침 길가라 어떤 외국인이 국수를 먹다가 눈이 마주쳤네요. 머쓱해라. 이 날씨에 스웨터를 입고 캐리어와 함께 구르는 동양 여자가 딱해보였는지, 외국인이 친히 '어디에 가냐' 고 물어주었습니다. '아임 고 투 카오산! 굿바이!' 이쯤되면 무슨 종교 이름같네요. 하염없이 카오산을 부르짖으며 캐리어를 끌고, 사진 속의 건물을 향해 돌진하는 가련한 동양 여자여. 열심히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레이디! 레이디!"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그 외국인이 '카오산은 그 방향이 아니다' 라고 또 친절히 쫓아와서 알려주었습니다. 또 되게 노련한 척 하면서 '알고 있다. 난 지금 이 건물로 간다' 라고 씩 웃어보였더니, 잠시 뒤에 술이나 마시자네요. 흔쾌히 거절했지. 그랬더니 명함을 주고 내 메일을 받아가면서 며칠 뒤에라도 꼭 마시자고, 당신을 만나서 감사한다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제스처를 취하는게 아닙니까. 훗. 온 태국이 나를 반기는구나. 음하하하!

 

문제는 여기서부터 였습니다. 제목 기대하고 오신 분들, 앞에 썰이 많이 길었죠? 구글맵을 사용할 줄 몰랐던터라 (그리고 진짜 이상한 생각이긴 한데, 뭔가 내가 GPS를 사용하면 누군가로부터 나의 위치를 감시받는 것 같아서 싫다는...) 파수만 요새에서 숙소까지 가는 법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물론 준비를 하나도 안하기도 했었고. 일단 파수만 요새에 도착해서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께 '저 이 건물까지는 왔는데 그 다음부터 가는 법을 모르겠어요.' 라고 메세지를 보냈는데, 그 다음에 오토바이 아저씨들한테 말을 건게 문제였죠.

 

"여기 아세요? 한국인이 하는..."

 

숙소 이름을 한참 보더니, 여기를 안다며 오토바이를 타라는 겁니다. 돈을 달라기에 무조건 싫다고 했더니 걱정말고 'free!' 라며 타래요. 일이 잘 풀리는데? 캐리어까지 있어서 어떻게 오토바이를 타냐고 했더니 끌어안으래요. 사진을 잘 보면 캐리어를 끌어안고 뒤에는 배낭 하나 매고 있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너무 많이 가는거예요. 택시를 타고 온 쪽으로 다시. 어 이상하다.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이 건물에서 얼마 안 걸린다고 했는데 어디까지 가는거야?? "내려주세요!!" 라고 계속 소리쳤는데, 달리느라 못 들은건지 안 내려주는건지 자꾸만 멀어지는. 불안한 마음에 잠시 오토바이가 멈췄을때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한테 "납치 당한것 같아요" 라는 메세지를 하나 보내고는, 또 다시 전속력으로 달리는 오토바이 때문에 메세지를 확인 못할 상황. 알고보니 아저씨는 한국인이 하는 아주 멀리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나를 데려다주었고, 손짓발짓 해가며 다시 그 건물로 데려다달라고 말하는 사이 메세지 수십통이 와 있었죠. 택시냐, 어디냐, 소리쳐라, 내려라, 왜 대답을 안하냐. (사장님, 죄송합니다.)

 

다시 겨우겨우 그 건물로 돌아와서, 그리고 나를 계속 마중나와있던 한국인 한 분의 인도하에 거의 반쯤은 넋이 나가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 싸장님은 격한 환영의 욕찌거리를 날려주셨다는... 쫓아다니면서 잘못했다고 계속 빌었습니다. 정말 어찌나 걱정하셨겠습니까. 땀으로 한층 더 쩔은 저의 스웨터 차림을 보고, 나중에 싸장님이 '옷부터 좀 갈아입으라!' 며...

 

방콕에는 5일을 머물렀는데, 그 때 그 사건 때문에 내내 '납치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납치녀 누나, 오늘은 어디가요?' 라던가, 새로 온 투숙객이 '혹시 납치녀세요?' 라고 묻는.

 

아. 예전에 성당에서 엠티를 갔다가 청양고추를 남의 목에 문지르고는 그만 손에 청양고추 물이 올라서 밤에 응급실에 실려갔던 적이 있거든요. 한동안 또 그 사건 때문에, 저의 응급실 설화(?)가 아름답게 구전되던 때가 있었는데... 제가 방콕을 떠나도 한동안 납치녀 사건은 부지런히 오르내리겠지요.

 

 

 

△ 아저씨. 꽁짜로 태워줘서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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