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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6년 1월 24일



나는 모자가 썩 잘 어울리는 편이다. 모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모자에 많은 것을 기댈 수 있는데, 감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의 은닉부터 시작해 의상의 포인트, 신경쓰지 않은 듯 하면서도 은근히 세련된 분위기 연출까지 맡길 수 있다. 모자가 잘 어울리려면 다만 얼굴이 작아서도 안되고, 이목구비의 뚜렷함에만 의지해서도 안 될 노릇이며, 모자가 얼굴의 어느 정도를 가리고 남은 여백이 이목구비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내가 이렇게 모자에 관해 일장연설을 하는 이유는 오늘 세수도 안하고, 물론 머리도 안감고 모자를 꾹 눌러쓰고 나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제는 종일 원고를 정리했다. 꼴랑 반나절 해놓고는 프리랜서의 고독과 혹독을 경험해버렸다. 오늘 오전은 아침부터 공들여 이력서를 쓰고 제출한 뒤 나름의 뿌듯함에 젖었다. '허술하다'는 평가를 듣기 전까지는. 왠지 모르게, 사실은 왠지 모를 것도 없이 - 날씬한 아이에게 "돼지야!"라고 백날 놀려도 털끝만큼의 영향도 주지 못한다 - 그 한마디에 기분이 몹시 어정쩡해진 나는 허술하게 몇 줄을 보완한 뒤 최종 제출을 해버렸다. 허술하다는 한마디가 허술한 나를 창 밖으로 내몰았다.

오늘을 끝으로 상영이 종료되는 <단지 세상의 끝>을 보러갈까, 서점에 가서 궁금하던 그녀의 책을 들춰볼까 고민하다가 서점에 가기로 했다. 서점에 가기로 한 것은 순전히 질투심과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지난 일요일 보러 간 공연에서 거 참 뭔가 어설프기도 하고 실수투성이 인 듯 하면서 그 실수마저 계획의 범주안에 있었다는 듯 태연한 그녀의 표정과 말투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코드를 외우는 곡의 작곡가이자, 드문드문 영화를 만들고 글도 쓴다. 나의 알량한 질투심에 그저 발랄한 청춘의 반짝이는 호기심과 그에 맞아떨어진 운으로 치부하고는 그녀의 창작물을 진지하게 대한 적이 없다. 최근에 발매된 그녀의 책도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별 관심이 가지 않더라.

그러나 그녀는 실력자였다. 몇 장 정도만 들춰보고 영화관으로 향하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서점 작은 귀퉁이 책상에 앉아 그녀의 얇은 책 한권을 다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책을 다 사려고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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