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제목이 도통 생각나질 않아서,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의 키워드로 두드려보았더니 나왔다.
<이터널 선샤인>의 남자 주인공은 여느 날, 갑자기 출근하려다 말고 반대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잡아탄다. 그리고 그 기차에서 (이미 기억을 지워버린) 옛 연인과 조우하고 그들은 다시 사랑에 빠진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남자 주인공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건조한 하루의 어느 날, 같은 시각에 출근하다 자살하려는 여인을 만나고 그 여인이 갖고 있던 책에서 기차 표를 발견하고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간다. 출근하지 않은 그에게 상사가 전화가 오자 그는 전화를 받아들고 담담히 대답한다. '○○ 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주인공들이 다른 출근길을 선택함으로 '시작' 되지만, 나는 이 다른 자체가 영화의 '전부'라고 믿는다. 다른 선택을 해버렸다는 자체가 이미 영화인 것이다. 누구도 쉽사리 출근을 위해 전철을 기다리며 문득 반대편 열차에 몸을 실어버리지 못하고, 출근을 해놓고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와 책 사이에 끼워진 누군가의 기차표를 거머쥐지 못한다. 두 시간을 겨우 자고, 혹시나 늦어 버릴까봐 10분씩을 쪼개 열 몇개의 알람을 맞춰두고 끄고 또 어설프게 잠들길 반복했다. 그 잠깐 잠깐 사이 아름다운 꿈을 꾸기도 했다.
문득 출근을 포기해버린 영화 속 주인공들이 대단한 것인지, 출근할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꿋꿋하게 출근을 해내고야마는 내가 더 용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몽롱한 정신으로 버스 번호를 잘못 보고 또 올라타고 멍-하면서도 이 두 편의 영화를 떠올리면서 '나는 결코 영화 주인공은 되지 못하겠지.' 읊조리는 것이다.
앞으로를 걱정해야 하니까.
누가 더 많이, 잘, 앞으로를 걱정해내고 있는 사람일까? 영화 속 주인공들? 아니면 나?
앞으로 따위는 없다는 듯이 현실의 기분과 감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괜찮은 앞으로가 펼쳐질 것이 아니던가? (영화 속에서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밖에 없다는 듯이 온통, 오로지 앞으로만을 위해 살 때야 적당한, 우리가 납득할만한 앞으로가 펼쳐졌던가?
모든 영화의 전부일 통영가는 버스에 몸을 싣지 못했다.
서울역이 지척인데 서울역행 철도를 타지 못했고
경주로 훌쩍 떠나지 못했고
방안에 꿈쩍않고 누워있지 못했다.
모든 영화의 전부일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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