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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떤 낱말들의 모임

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

 

 

 

 

 

 

뚜껑을 돌릴 때가 참 지랄 같습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의 봉인이 해제될 때, 아, 이제 이 술을 환불할 수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제일 괴롭습니다. 여러분들도 다들 잘 아시겠지만,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첫잔을 마시면 그런 생각은 다 휘발되어 날아가지만요. 혀와 입천장에 불을 붙이며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 저는 망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p.104)

 

 

 

전날의 뉴스나 오늘의 뉴스나 별로 다를 게 없지만 전날의 뉴스를 보면 저건 이미 지나간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화가 덜 납니다. 내일의 날씨를 보면서 잠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전날 뉴스에서는 내일의 날씨이지만 저는 오늘 그 날씨를 이미 겪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져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미 오늘의 날씨를 알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내가 아는 얘기를 뒤늦게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화가 안 나고 잠이 오는 겁니다. (p.105)

 

 

 

주방 싱크대에다 먹을 걸 넣어두고 그걸 까맣게 잊고 있다가 1년 후에야 갑자기 생각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얼마나 썩어 있을까요. 문을 열면 바퀴벌레와 온갖 벌레들이 음식물을 뜯어먹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음식물이 이상한 생명체로 변한 것은 아닐까요. 저는 문을 열기가 두려웠습니다. 싱크대 문을 열 수 없는 것처럼 저도 제 안을 들여다보기가 겁이 났습니다.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