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에게.
'좋은꿈꿔요~^^ 안녕' 을 듣고 좋은 꿈으로 가는 길목으로 향했으면 좋았을텐데.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우... 내 침대가 아니니까 눕기가 몹시도 망설여져서, 술을 좀 먹고 피곤해서 죽을 것 같으면서도 끝끝내 앉아 있었나 싶더라고요. 나는 지금 친구의 빈 집에 혼자 있어요. 얼마 전 친구가 비밀번호를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혼자 복도에 주저앉아 초밥이나 까던 그 집이요. 오늘 회사에서 나와 잔뜩 무거운 기분으로 같은 팀원들과 술을 마셨는데, 내일 다시 회사에 나가봐야 하거든요. 아침에 부동산도 들러서 집 쇼핑도 해야하고. 그래서 근처의 친구집에 묵어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친구가 집이 비었다고 그냥 편하게 있다가 가래요. 어차피 비밀번호도 아니까 편한 마음으로 왔어요. 복도에서는 이미 와이파이가 나를 반겨주는데 아무리 비밀번호를 눌러도 또 안되는거야. 밤 열한시가 넘어서 친구한테 따졌지. 또 안된다고. 비밀번호 바꿨냐고. 안 바꿨다기에 호수를 확인하니까 어머나. 반대편이네? 다시 친구집으로 가서 몇 번이나 눌렀는데 또 안 돼. 혹시나 싶어 친구집의 옆집에 대고 비밀번호를 눌렀거든요? 열려라 참깨! 열렸네. 이 정도면 술이 좀 취했네요.
늘 멀끔하게 정리된 친구집으로 들어와서는 짧은 한 편을 쓰고 자려고 했어요. 아무리 쓰려고 해도 두 줄을 못 넘기겠던 저 사진으로요. 오늘, 그러니까 어제 이 친구가 짧은 결혼 생활을 마지막으로 정리했거든요. 편의상 오늘이라고 할게요. 난 아직 안 자니까. 오늘 새벽부터 서울이란 도시에는 비가 내렸는데, 아침 출근길에 친구가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 라고 문자를 보내왔어요. 그걸 보면서 한동안 대답도 못하고 버스 창밖에 묻어있는 물방울들만 줄곧 바라봤네. 그냥 그랬어요.
오늘은 특히 부담감이 좀 심해져서 일로도, 삶으로도 아무것도 못쓰고, 바쁘긴 또 바빠져서 책도 이번주에 겨우 반 권을 읽었고. 그래서 오늘은 음주했지만 자기전에 뭐라도 써야겠다 싶어서 컴퓨터를 딱 켰는데, 이 밤에 또 반대편 낮에다가 잔뜩 주절거렸네. 농담같겠지만 아직도 술이 안 깨고 있어요. 친구가 결혼했을 때, 남편없는 신혼집에 놀러간 적이 한 번 있거든요. 그게 마지막이었지만. 그 때 친구의 남편 자리에서 잤어요. 기분이 되게 이상하더라구요. 나는 침대를 쓰지 않지만, 누군가의 정해진 잠자리에는 그 사람이 꿔야할 꿈도 정해져 있을 것만 같아서 미안하고 부담스럽고 그랬어요. 잠을 자는 자리가 지정되어 있다는게 참 신기하지 않아요? 너는 여기에서만 자라- 하고. 이불은 아무데나 슥슥 깔고 슥슥 펴서 자면 되는데. 자다 일어나보면 머리랑 발이 반대 위치에 가있기도 하고. 침대는 그럴 일이 없지. 아 나는 침대를 쓸 때도 자주 기괴했구나.
친구집에서 자주 밤을 가졌지만 친구의 침대에 누운 적은 한번도 없어서, 주인 없는 침대를 쓰려니 기분이 뭣해서 자려다가 다시 컴퓨터를 켜버렸어요. 이 친구 옆에 있어야할 자리가 생각나기도하고. 한달전이었나, 내가 애독자에게 헌정 글을 하나 쓰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지금 이런 술취한 상태에서 쓰려던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알딸딸하지만 진심으로 쓰고 있어요. 게다가 편지글이라니. 내가 여태 쓴 글 중에는 아마 편지글이 없을껄?
내가 보내준 노래는 들어보았어요? 듣고나선 감상평 알려준다더니 알려주지도 않네. (난 유선씨가 알려준 노래 가끔 듣고 있어요.) 내가 보내준 노래를 부른 가수가 내 기타 선생님이예요. 알죠? 내가 이 사람을 왜 좋아할까 곰곰 생각해보니, 찌질한 걸 하나도 안 찌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어서 좋은거 같아요. 그런걸 다 말하더라구요. 몇 년전에 뉴욕에 기타치러 갔는데, 돈이 없어서 어느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배달도 하고 바텐더도 하고 뭐도 하고 뭐도 했다. 내 공연에 사람이 열 명만 와도 안심이다. 기타를 치는 공간, 그러니까 삶을 꾸려나가는 공간도 되게 좁아요. 그런데도 그 공간을 이름모를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열어주는거잖아요. 난 이사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에게 방을 보여줄 때, 그게 불과 몇 날밖에 안되는데도 꽤 부끄럽던데. 하하 이렇게 삽니다. 이런 느낌.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되게 찌질한 면을 유선에게 참 많이 보여줬는데. 그게 우리의 시작이기도 하고. 그래도 우리 안지가 제법 되어서 찌질하다가 점점 못 찌질이의 모습도 가끔 보여주고 있는거고요. 돌이켜보면, 뭐 돌이킬 필요도 없이 조금 아까도 포함해서 나는 유선한테 일방적으로, 한결같이 찌질했네. 참 이런 관계도 유지된다는게 놀랍다. 둘 다 찌질하면 금방 무너질텐데, 어느 한쪽이 파격적으로 찌질하면 그게 또 괜찮은가봐. 뭐 상대방 의견도 들어봐야 알겠지만. 에헴. 그나저나 찌질하다의 뜻이 가난해보인다. 없어보인다. 사람의 외모와 됨됨이가 몹시 추접하고 더럽다. 보는순간 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 사람을 일컫는다. 찌질이는 '지지리도 못난 놈'이란 뜻... 너무 심한데. 나 이 정도는 아닌데. 난 소중하고 싶은데.
뭐 나는 기타 선생처럼, 극명하게 소심한 것들에 대해서 솔직한 사람은 아니예요. 그렇게 소심한 것들에 대해서 덤덤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대심하다는 거거든. 자기는 자신있다 이거야. 내가 어디에서 뭐를 하든 난 나야. 이런게 마음 밑바닥에 충분하게 깔려있으면 정말로 어디서 뭘하든 당당당당당할텐데, 나는 뭐 그런 사람은 아니니까. 극명하게 소심하긴한데 거기서 끝이여. '그래 나 소심하다 어쩔래!' 이런거.
여기까지 쓰고나니 내가 도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 졸리기도 하고 술도 안깨고. 주섬주섬 메모를 찾아보니까 - 쓰다가 잊을까봐 미리 핵심을 적어둘 때도 있어요. 프로의 내음. 캬 - '찌질이에서 덜 찌질이도 좋지만, 찌질이면서 하나도 안 쫄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가 되자' 라고 적혀있네. 근데 이건 나만 해당되겠다. 유선은 일단 찌질이가 아니고, 전교 1등이니까. 나는 뭐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니 뭐 지금도 그렇지만 '밑바닥이 꽤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렇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면 '흔들릴때 기깔나게 잘 흔들려보자' 이 정도로 합의를 해야지 뭐. 어떻게 해. 주유소 춤추는 인형처럼 신명나게 흔들릴 수 있으면 제일 감사하겠고.
아까 돈 얘기로 기분을 풀어주겠다며, 돈이 많이 있으면 뭘 하고 싶냐고 했잖아요. 내 대답이 영 시들했는데 지금도 글쎄. 돈이 없어서 못 하는 일이 잘 없다고 생각해서 인건가, 아니면 내 관심사나 취미 자체가 그리 비용 드는게 아니라서 그런건가. 긁적. 아. 내가 태국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되게 불행해지는거예요. 또 가고 싶은데 나는 돈이 없어. 이런 생각 때문에. 그런데 사실 돌이켜보면 태국에서도 그렇게 좋았던 일만 있던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다녀오고 나서는, 태국에서의 열흘간이 내 인생 최고의 행복지수였노라고 스스로 점수를 매기고 있더라고. 난 거기에 가야 행복해지는데, 못 가니까 너무 불행해 이러면서 방바닥에 배 깔고 엎드려서 자괴하고. 근데 그럴꺼면 안가는게 오히려 더 행복한거잖아요. 행복의 비교대상이 생겨버리면. 거기에 있을때는 거기에 있는대로 행복하면 되고, 다녀와서는 다녀와서 또 행복하면 되는데 내가 그리 균형있는 인간이 아니었던거지. 특히 그 무렵에는. 두어달 정도 굉장히 불행해하고 나서 늦게 또 아차 싶은거지. 그 열흘땜에 내 인생을 다 버리겠다. 안되겠다. 어찌됐든 행복하자. 정신승리다. 이런거. 있으면 있는대로 행복하고 없으면 또 없는대로 행복해해야겠다. 이건 취사선택없이 그냥 머스트야.
이제 결혼을 정리하는 내 친구는 아주 자주 입버릇처럼 '여자는 돈이 있어야 된다' 라고 말하긴 하는데. 아. 내가 서울에 어떤 동네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래요. 내가 서울에 올라와서 첫정을 준 동네기도 하고.
'첫정 같은 것은 다 잊고 정으로도' 좋아하는 그 동네에 집을 하나 사고 싶습니다. 그러면 될꺼 같은데? 난 어릴때부터 지구가 별이라는게 좀 간지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도 별에서 태어났다이거야. 얼마나 멋있어. '사람이 별에 태어났는데, 그래도 살면서 한번쯤은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은 순찰은 해봐야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있어요. 내가 소원이 적도에 가보는거거든요? 내가 적도에 대해 품고있는 정서가 있어요. 그걸 눈으로 보고 싶어요. 위도가 0이라는 것도 멋있고. (별게 다 멋있네). 나랑 아주 아주 친한 딱 한명만 내가 적도에 가보고 싶어하는걸 아는데, 이해는 못하더라만. 아무튼 이 별 어딘가에 내 주소가 하나있으면 든든할 것 같아요. 어디론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건 되게 중요하거든요. 나도 서울에서 주소를 갖지 않고 당분간 이곳저곳에서 머물렀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서울이 되게 설었어요. 그런데 고심해서 이름이 예쁜 동네를 고른 다음, 그 곳에 나의 주소를 가지게 되니 신기하게도 서울이 내 안에 녹아들더라니까. 우리집이 여기에 있구나, 그런 사실만으로도 굉장한 위안이 된다는걸 그 때 알았어.
한옥을 사고싶다 했는데, 사고 싶다기보단 짓고 싶어요. 소박한 마당엔 개가 뛰어놀고 구석의 작은 꽃밭엔 수국 모종이나 몇 자루 심어두지 뭐. 작년까지 다녔던 출판사의 마당에는 늘 계절이 진행되고 있었거든요. 봄이되면 라일락이 피어. 그리고 라일락이 질때쯤에 불두화라는 하얀 꽃이 활짝 피는데, 이 꽃을 잘 들여다보면 작은 꽃들이 마구 모인 겹꽃이예요. 이 꽃은 피어있을 때보다 지고 나서가 환상이거든요. 손톱 크기만한 하얀 꽃들이 엄마 꽃이 진 자리에 후두두 떨어져있는데, 그 꽃들이 종이를 오린 마냥 단정하게 예뻐요. 내추럴 네일 아트라면서, 손톱 위에 꽃을 올려보기도 하고 며칠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장미가 활짝 피어있고. 일을 한다면 걸어서 출근했으면 좋겠고. 아. 요리하는 공간에는 햇살이 널찍하게 잘 들었으면 좋겠다. 난 그거면 충분할꺼 같은데, 이게 다 소시민은 (서울에서) 누리기 힘든 혜택들이라.
프로그레스 체크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늘 유선은 프로그레스 체크를 통과하는 전교 1등이니 이제는 응원할 필요도 없겠...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응원 하고 있어요. 나 얻어 타야되거든.
자 그럼, 내가 받은 말을 다시 돌려줘야겠다. 좋은 꿈꿔요 안녕.
(*) 오늘도 문득 괴롭혀서 미안. 내내 횡설수설이었어요. 혹시 이 글에 어울리는 사진이 있다면 얼른 풀어보시게. 애독자의 의견에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찡긋.
△ 오늘 누군가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이 말이 그리 인상적이진 않았어요.
근데 좋았다고 해야하나. 이걸 가지고 집에 와서 글을 쓰려는데 몇 번이나 어긋나는거예요.
그래서 그냥 지구 반대편에다가 하소연을. 이 버릇 고쳐야 할텐데.
'('_')()()() > 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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