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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끝이 가까워서야 끝을 아쉬워하네.



할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사람이고 싶어 했을까. 


엄마의 엄마가 아프다. 엄마는 아픈 엄마의 엄마를 보면서 아파한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아프다. 엄마와 자식은 애당초 '아픔'으로 연결된 사이다. 시작부터가 몸을 찢는 고통과 함께이고 (둘 중 누가 먼저이든) 상대의 마음을 찢으면서 끝이 난다. 아니, 몸을 찢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마음을 찢고 나서도 끝나지 않으니 어쩌면 시작도 끝도 없는 사이일 수도 있겠지. 


할머니는 부산의 어느 병원에 마른 귤처럼 놓여있다. 물기가 하나도 없고 쪼글쪼글해진 몸으로 오도카니 누워서 잠만 잔다. 자식들을 아무도 못 알아보는데 희한하게 엄마만 알아본다고 들었다. '경이 왔나?' 하고. 엄마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엉엉 울었지. 몸을 찢어본 사람들만의 유대일수도 있겠다. 


아주 어릴 때의 나는 할머니를 무척 좋아했다고 들었다. 울고 불며 떼를 쓰며 기어코 할머니 집에 가겠다고 난리를 떠는 바람에, 득달같이 할머니 집으로 나를 데려간 밤이 적지 않다 했다.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할머니가 왜 그렇게 좋았던걸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몇 가지 조각을 추려본다. 여섯 살 때였나, 할머니 집에서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 잘 때 내가 자꾸 이불을 걷어차는 바람에, 할머니가 내내 잠을 못 자고 내 배 위로 이불을 덮어준 어느 여름날 밤이 생각난다. 엄마와 목욕탕에 가면 엄마는 나를 마치 걸레처럼 앞뒤로 뒤집어가며 대차게 때를 밀어댔는데, 할머니와 목욕을 하면 그저 젖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기만 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워낙 깡말라서 몸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무살이 훌쩍 넘었는데도 '까스불 조심해라' 하고 주의를 주던 할머니 전화가 생각난다. 잔소리가 너무 길어 전화기를 귀에서 한없이 멀리 떼었다가 타이밍에 맞춰 '응,응' 했었지. '듣고 있나?' '응,응' . 어린 입맛에도 할머니가 해주는 요리가 꽤 맛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몇 가지 요리는 정말로 맛있었다. 할머니가 전기 밥솥으로 만들어주던 계란찜, 호박을 싫어하던 엄마가 단 한번도 나에게 해준 적이 없는 걸죽한 호박범벅, 자박한 강된장. 


할머니는 작은 성 안에 사는, 정확히는 갇힌 사람 같았다. 할머니가 사는 오래된 아파트는 늘 어두웠고 늘 지저분했고 늘 뭔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할머니는 작은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며 오래도록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 지금 생각하니 그 손짓이 구해달라는 신호처럼 느껴지는걸까. 


어릴 때, 아빠가 술을 먹고 집에서 행패를 많이 부렸다. 나는 내복바람으로 뛰어나가서 한밤중에 할머니에게 전화를 많이 걸었다. 길 모퉁이 슈퍼에 있는 공중전화를 붙들고 '할머니' 하고 울음을 터트리면 할머니가 언제나 왔다. 술 취한 아버지는 장모님 앞에서 술 기운에 무릎을 꿇고 뭔가를 횡설수설 했었는데, 그때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센 사람 같았는데. 그런데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맞는 걸 봤을 때는 아무한테도 전화를 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방문을 닫았다. 왜 그랬을까. 할머니가 나를 구해준 것처럼 나도 할머니를 구해줬어야 했는데. 


할머니의 삶에도 물기가 가득했던 적이 있었겠지? 할머니를 떠올리면 종이인형 같다. 한번도 웃어본 적도 없고 한번도 울어본 적도 없고 한번도 화내본 적도 없는. 한번도 무언가에 성공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한번도 무언가에 실패한 적도 없는. 엄마는 할머니가 이렇게라도 오래오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나는 종이인형이 차라리 부욱 찢어졌으면 좋겠어. 할머니가 삶을 끝내기 전에, 화도 내고 아프다고 소리도 지르고 막 슬퍼서 울었으면 좋겠어. 그게 삶이잖아. 


할머니가 혹시 나를 알아본다면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해줘야지. 그 때 못 구해줘서 미안하다고, 내가 나빴다고. 그리고 늘 나만 용돈 제일 많이줘서 고마웠다고.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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