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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머리

여름 2

 

 

 

인터넷 서점에 '여름'이라는 낱말을 넣어본다. 4천 몇 개의 여름이 검색된다.

 

나에게 있어서 계절은 줄곧 봄이었다. 오나 싶게 가버리는 고 짧은 찰나의 시간을 나의 계절로 명명하고는, 봄의 나머지 계절은 늘 봄을 기다리며 보냈다. 막상 봄이 오면 쉬이 가 버릴까 염려되어 채 즐기지도 못했으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 봄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있기도 한 혹독한 겨울이 오면 늘 얼어붙은 입술로 '이민을 가겠다, 이민을 가야겠다' 를 두 주먹 불끈 쥐고 추운 계절 내내 중얼거렸다. 봄이 슬그머니 가까워지면서 누그러지기 시작하는 공기의 온도에 발맞추어, 겨울에 대한 나의 화도 슬그머니 누그러지고 마침내 봄이 오면 이민을 결심했던 사실을, 눈 앞에 펼쳐진 온통 분홍 앞에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아직까지 한국 땅에 발 꾹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거겠지만.

 

온통 봄 밖에 없는 나에게 몇 해전부터 오뉴월이 이쁜 이름과 함께 슬쩍 발을 디밀더니, 올 여름엔 아예 봄의 지분을 얼마간 꿰찰 요량인지 자꾸만 여름이 좋다. 요리책을 찾다가 우연히 들어온, 그저 푸른 표지가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단숨에 주문했다. 제목에 '여름' 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새로 산 책은 아직 표지조차 들춰보지 않았으면서, 오늘 또 '여름'이라는 키워드를 인터넷 서점에 넣어보고는 4천 몇 여개의 여름 앞에 슬그머니 미소 짓는것이다. (물론 또 샀다.)

 

뭐든 극으로 치닫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 실컷 해보고 나니 - 뜨거운 여름은 나에겐 늘 영 별로였다. 뙤약볕에 살이 시뻘겋게 익어버리는 것도 싫고, 기껏 만들어놓은 음식이 쉬이 상하는 것도 싫고, 아직 다이어트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노출을 감행해야하는 반 강제적인 상황도 싫고. 뭐도 싫고. 뭐도 싫고. 뭐도 싫고. 싫고. 싫고.

 

그런데 요즘은 여름이 어찌나 좋은지.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찐~한 색감의 과일과 채소가 참 반갑고, 푸르고 푸른 잎사귀를 드리우는 길가의 나무들도 참 아름답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대부분 커다랗게 부푼 구름과 맑은 파랑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여름은 밤이 백미. 깊어져도 알맞은 온도 덕에 낡은 반바지 하나만 입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르고는 여기저기 가볍게 쏘다니기 좋다. 친구들과 기울이는 맥주 한 잔이 빠질 수 없지. 후두두둑 떨어지는 비도 좋고, 박하사탕을 귀로 먹는 것처럼 시원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매미소리는 얼마나 상쾌한가.

 

야채며 과일을 듬뿍 샀다. 라임청도 담고, 작년에 먹었던 가지 샐러드도 담고, 이것저것 만들어야지. 한여름의 에너지와 가까워진다. 왠지 기분좋은 겨울생. (녹아버릴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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