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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그리고 낯선 목소리



모두가 잠들어있는 한낮. 우리집 추석의 풍경이다. 늘 가는데만 여섯시간 이상을 도로 위에서 보내던 십여년의 세월이여, 이제는 우리 가정도 휴식하노라. 엄마는 아들이 사온 포도상자를 베고 거실에서 곤히 잠들어있다. 썩 불편해보이는데 참 잘 잔다. 아빠보다는 아부지가 더 잘 어울리는 나의 아부지 역시 잠들어있다. 아부지는 늘 쩌렁쩌렁 울리는 TV의 보험광고를 자장가삼아 잘 잔다. 아빠는 그러고보면 나와는 정반대로 적막을 못 견디는 사람같기도 하다. 


나는 집에 와서 무얼 잘못먹었는지 끊임없이 배앓이를 하고 있다. 끄응. 자리에 누워 핸드폰을 툭툭 만지는데 갑자기 낯선 번호가 뜬다. 한껏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내다~

/ 누구시죠?

/ 니 내 번호 저장안했나!!!!!

/ 아, 혁이가? 


밴드 혁오의 오!혁이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내가 아는 혁이다. 목구멍을 치고 나오려고 출발 신호만 기다리던 목소리들에 한껏 바람이 빠졌다. 몇달전인가, 중국어로 '예쁘다, 아름답다, 귀엽다, 좋아한다' 등 온갖 간드러진 표현은 다 알려달라고 연락이 왔던 그 혁이다. 중국 여자와 사랑에 빠진줄 알았더니 부산 여자와 사랑중이라고. 부산에 사는 중국여자냐고 재차 물었더니 화를 낸다.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냐. 


차례 지내고 우리동네를 지나다가 내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는 목소리가 사뭇 고맙다. 결혼은 언제 하느냐를 쌍방으로 주고 받은 뒤, 아마 내년쯤이면 이런 인사도 못 듣겠지싶어 고맙고 또 미리 서운하다. 결혼한 고향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려다가 친정 챙기랴, 시댁 챙기랴 바쁘지 싶어 말았다. 여름날, 기세 좋게 피어오르던 고구마 순과 내 마음에 다정하게 품었던 이름같은 것들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TV 광고가 쩌렁쩌렁 울리는걸 보니 아빠가 일어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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