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척, 붉다!
두 시간을 겨우 자고, 말도 안되게 퇴근 무렵 회의까지 마친 나는 집으로 오니 뇌를 포함한 온몸의 신경이 짜글짜글 해진 상태. 복숭아를 연거푸 두개 세개나 먹고는 블라인드를 다 내리지도 못하고 엎어져 잠이 들었다. 눈을 잠깐 뜨니 밤 11시, 선풍기를 켜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선풍기는 줄곧 냉장고를 바라보고 있더라. 어쩐지 나는 덥더라. 냉장고는 더 시원했겠네. 겉과 속이 똑같은 놈이 되었어. 열반의 경지에 다다랐어. 축하한다.
'어억!'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같은 자세로 열두시간을 내리 엎드려 있었더니 내 허리를 꾹 찌르면 식초가 졸졸 나올 것 같다. 어억. 시큰해! 한동안 억!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겨우겨우 굴러 내려온 뒤, 방안에 널브러진 빨래와의 사투를 시작했다. 마른 빨래는 개고 젖은 빨래는 세탁기에 넣는다. 고향집을 다녀온 짐을 그제야 풀고, 어제의 처참한 복숭아 껍질을 처리하고, 도시락을 싸고, 씻고.
*
출근길 버스에 머리가 붉은 여인이 있었다. <클로저>의 나탈리 포트만이 보여줬던 새빨간 붉은 머리와 비슷한 빛깔이다. 참 예뻤는데. (예쁜 애는 뭘하든 예쁘다는 만고의 진리!) 옆자리에 앉은 또래 여인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오늘 아빠 생신인데 돈을 안 뽑았네.
- 얼마 드리려고?
- 한 20만원이면 되려나?
- 그정도면 되지 않나?
- 다음 달엔 또 엄마 생신이야.
나는 흘끗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뻔 했다. 오늘이 아빠 생신이고, 다음달이 엄마 생신이기 때문이다. 나와 남동생은 고작 한 살 터울 밖에 나지 않으니 그 사이에 누군가를 또 끼워넣기란 불가능한데. 굳이 얼굴을 확인하진 않았다. 각자 아빠 생신을 축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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