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르스에 좋다는 파인애플을 사왔는데, 왜 먹질 못하니. 먹질 못해.
김첨지 아저씨가 생각난다.
*
'왜 이렇게 안 도와주냐'
퇴근하고 한숨이 푸우욱. 딱 한대만 태우고 싶은 하늘. The love게도 예쁘네. 한평생 어떻게 지켜온 청정 폐인데 한낱 감정에 휩쓸려 옥체에 해를 가할쏘냐 싶지만 - 노 니코틴, 노 카페인, 예스 오예스 - 오늘같은 날은 행인1 담배연기라도 좀 맡고싶다 진짜.
'비밀번호 알려줄테니까 집에 가 있어.'
나무 밑에 우두커니서서 맞은 편을 멍하니 바라보며 버스 몇 대를 보냈다. 아침에는 지하철 변태, 내 듣기로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감정만 앞세우는 회의, 하루종일 마음 불편한 업무, 상처되는 말과 눈빛. 하루종일 바짝 곤두선 몸과 마음의 날. 이게 다 그 변태 새끼때문이다. 어디 혼자 쿡 처박히고 싶은데 아차. 아직 내 방이 없지.
*
정오 무렵에 친구가 보내온 메세지. '비밀번호 알려 줄테니까 집에 가있어. 영화나 보던지.' 갈까말까.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몇 대를 보내고 마음 갈피를 못잡는다. 그래. 하루종일 이렇게 시달렸는데 기분이나 풀자. 친구집 가는길에 대형마트가 있어 주중내내 미뤄왔던 초밥을 사고, 파인애플도 샀다. '메르스에 좋아요 아가씨~ 손질도 다 해놔서 먹기 편해~' 그래. 오늘은 사치할꺼야! 백수고 뭐고! 열대과일도 사고, 물고기살도 먹고! 흥. 자연히 다음 발걸음이 주류코너에 가서 멈췄지만, 친구집 냉장고에 주종별로 진열되어 있으니 먼저 가서 까야겠다. 요새 왜 이렇게 술을 드시나. 아몰랑.
오늘의 존슨 이펙트는 퇴근으로 끝난줄 알았고, 끝날줄 알았다. 친구집도 무사히 잘 찾아왔고 현관문도 열기전에 와이파이가 알은척을 하며 반겨주니까. 와이파이 신호가 화사하게 피어난다. 어서와.
무려 4단계까지 친절한 단계별 설명으로, 문을 안 열고 싶어도 열수밖에 없도록 친절한 설명이었건만 아무리 눌러도 안된다. 정말로 한 오십번을 누르고 나니, 처음엔 화가 나다가 화낼 힘도 없어졌다. 변태새끼...때문이다. 이게 다.
△ 멀쩡하긴 개코가 멀쩡해. 이년아. 비밀번호 맞다고 그렇게 우기더니.
*
친구는 일 중이라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겨우 걸린 통화에서 '비밀번호가 아무래도 틀린것 같다'는 나의 주장에 '맞다니까!'를 다급하게 반복하고 끊어버렸다. 시간차 공격을 해가며 비밀번호를 재차 물었지만, 춘향이 수청거부와 같은 마음으로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맞다니까!'
술을 마시는줄 알았다면 비밀번호에 대해 조금의 의심을 해봤을텐데, 친구년은 계속 맞다고하니 내가 기계를 잘 못만지는가 하는 의심이 올라온다. 옆집을 두드려서 문을 좀 열어달라고 할까하는 마음도 들고, 그냥 집에 갈까 하는 마음도 든다. 내 초밥, 내 샤워, 내 맥주... 어디갔어요?
고향집은 주택이라 아직 열쇠를 쓴다. 열쇠가 많이 필요하기도 하고. 대문용, 2층 현관에 위 아래, 1층 현관에 위 아래, 그래. 2층 현관에 하나 더 필요하다. 동생놈은 뭔 열쇠를 그렇게나 많이 들고 다니는지, 누가보면 진짜 구준표인줄 알만큼 스무벌 정도의 열쇠를 들고 다닌다. 몸 만드는 중인가. 고향집에 급하게 간 날에는 미처 열쇠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열쇠가 필요없으니 자꾸 그 필요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가족 중 누군가와 연락이 닿으면 다행인데, 열쇠도 없이 연락도 닿지 않는 그런 날에는 하염없이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어쩌겠는가. 사실은 굉장히 짜증스러운 기다림인데 내가 이 짓을 친구집 오피스텔 복도에서 하고 있을줄이야. 존슨 이펙트는 아직도 유효한거냐.
친구도 모르는 이웃 사람들을 여럿 봤다. 복도에 앉아 초밥을 펼쳐놓은 여자 얼굴 한 번, 초밥 한 번 보고 좀 놀란 눈동자로 사라진다. 하나 위로가 있다면 그래도 와이파이는 잘 터진다는거. 쩝.
*
초밥과 파인애플을 사들고, 룰루랄라 샤워 후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기대하며 부푼 마음으로 친구집 앞에 선 시각이 7시 40분쯤. 저녁 아홉시가 되어서야 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미얀미얀! 현관문을 열려는 친구를 급히 저지했다.
야. 잘 봐. 내가 틀렸는지. 니가 시키는대로...
친구가 문득 '야. 끝에 1이 붙어야 하는데...' 라며, 내게 알려준 번호에서 1을 더한다. 야!!!!!!!!!!!!!!!!!!!!!!!!!!!!!!!!!!!!!!!!!!!!!!!!!!!!!!!!!!!!!!!!!!!!!!!!!!!!!!!!!!!!!!!!
두 시간동안 소주 두 병에 폭탄 두어잔, 쏘맥까지 참 골고루 말아잡수고 오신 내 친구년. 술에 취해 먹고 사는 것의 피로를 토하며 계약 성사를 부르짖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끝내는 웃음이 나온다. 그래. 얼마나 겨를없이 마셨으면 집 비밀번호도 기억못할까. 좀전의 술자리를 복기하며 열연하는 친구의 이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계약성사를 위한 이빨을 그렇게나 까댔는데 아직 남아있는거지? 뭐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라도 깔 테세다만.
'영화는 내가 쏠게' 라는 그 말에 '쓰리디'를 붙였다. 내가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남의 집 앞에 쭈그려앉아서 초밥이나 까면서 얼굴도 다 팔리고 흐규흐규. 영화관으로 가는 길에 비가 후두두 쏟아졌고 제법 여름같아서 히죽거렸다. 히죽거리는 내 손에 친구가 맥플러리 오레오를 들려준다. 늘 한결같은 내 취향에 감사하다는 코멘트와 함께.
쥬라기 공원. 재난 영화의 절대 불변 법칙. 주인공은 안 죽는다. 그리고 멋있다. 한 줄 감상평을 남기자면 '남자는 어깨'. 남자는 어깨지 암.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온통 푸르고 축축해서 신이났다. '공룡이 쫓아온다아아아아아아' 깔깔 소리를 지르면서 비젖은 아스팔트위를 달리는 기분.
( +) 고유명사로 생각했던 존슨. 선배와 대화를 나누다가 '존슨이 뭐냐'는 선배의 물음. 네? 뒤이어 '여자 중에 아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껄? 도대체 어떻게 안거야?' 네?
에이. 설마. 내가 생각하기에 나름 탁월한 전문가(?)인 또래의 여성에게 '너 존슨 알아?' 라고 물었더니 '누구야? 누군데?' 라는 대답. 대학 1학년때 어울리던 오빠 무리들이 번뜩 떠오른다. 참 좋은거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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