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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처럼

우주둥이 2016. 12. 28. 15:26




출발 3일전이라고 항공권이 메일로 날아왔다. 베트남이라. 정말로 가는구나. 베트남에 학교 선배가 살고 있어서 뭘 사갈까 고민하다가 코코몽 슬리퍼와 샤워볼을 샀다. 아내분은 베트남 사람이라던데 뭘 사야하나. 지금 돌아보면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구나' 싶지만 지난 여름 선배가 갑자기, 그러니까 거의 10년만에 연락이 닿았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 잘 사니?

/ 오랜만이네요!

/ (어쩌고 저쩌고) 난 베트남에 있어.

/ 아 ~ 그렇구나.


지난 여름에 풀무원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의 요리 블로거로 잠시 활동하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모인 식사자리. 테이블 끄트머리에 뒤늦게 자리를 잡은, 숫기 없어 보이던 또래 여성 하나와 이야기를 드문드문 이어가다 이야기의 한자락이 그녀의 여행에 닿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막혔던 말문이 트이고 없던 숫기가 화분에 물을 준 것처럼 총총 살아난다. 프리랜서라 세계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도 다녔다는 그녀. 특히 베트남의 달랏과 아이슬란드는 꼭 가보아야 할 곳이라고 추천에 추천을 하길래 가만히 마음에 새겨두었더랬다. 베트남 달랏. 


마음에 새기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10년도 넘게 소식조차 주고 받지 않았던 선배 하나가 연락이 된 것이고 그는 베트남에 둥지를 틀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주거 중이라는 말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베트남 여행 갈 거라는 말을 했더니, 편하게 놀러오라며 흔쾌히 집까지 초청을 해주었다. 우주가 하는 일은 알 수가 없다. 늘 감사해야지. 



(*) 



내 주변에 아이가 있었던 적은 드물다. 동생과는 한살 터울이라 서로의 성장판을 발과 주먹으로 자극해주면서 나란히 키를 높여 자랐고 -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때렸는지, 둘 다 훌륭하게 성장했다 - 흔히 있는 이모도 없어서 주변의 많은 이들이 경험한 이모의 출산은 구경 할 수가 없었다. 엄마도 위와 아래로 거의 연배가 비슷한 오빠와 남동생이 있어서, 외사촌들과도 한두살 터울로 나란히 자랐으니 정말로 아이를 구경할 수가 없었다. 친한 친구들 몇은 결혼을 갓 했지만 아이가 없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은 나와 모두 멀리 떨어져 살아서 그 아이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직. 그러니 아이를 안아본 적도 손에 꼽을 정도. (무서워)


생존을 위한 태생적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말고, 나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다. 존재 자체로의 아이들에 관심이 많아서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데, 그들의 행동은 감탄할만한 구석이 있다. 삶의 모든 부분을 놀이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히다.


출근길, 엄마 손을 잡고 비탈을 내려가던 아이가 엄마의 다른 손에 들려있던 분리수거 봉투 안의 페트병이 떨어져 데굴데굴 저만치 구르는 걸 보고 그리도 서럽게 운다. 뭐가 그렇게 울 일일까. 딱 봐도 버리려는 쓰레기인데. 설마 인생의 보물로 둔갑시킬 작정인거냐. 아침부터 온 골목을 쩌렁쩌렁 울리는 아이의 샤우팅을 듣고 있자니 퍼뜩 드는 생각이 부.럽.다 이다. 그렇게 내킬때 쩌렁쩌렁 울 수 있어서, 별 거 아닌걸로 그토록 서러울 수 있어서 부럽다. 안과에서도 시력 검사를 하러 온 아이가 새로 쓴 안경이 어색한지 그렇게도 서럽게 울더라. 나는 일곱살인데도 꾹 참았는데. 나쁜 새끼. 부러운 새끼. 


또 하나 감탄할 점은 삶의 모든 부분이 놀이라는 것. 지나칠만큼 다 놀이라는 것. 온통 놀이뿐이라는 것. 그저 놀이일뿐이니 즐겁고 집행에 따른 보고서도 결과에 대한 피드백도 없으니 양 어깨에 날개에 없어도 하늘을 날듯이 가볍다는 것.


/ 5!4!3!2!1!


사흘전 크리스마스. 춘천행 기차. 앞자리에서 떠드는 아이들을 잠깐 바라보니 그렇게 열심히 숫자를 센다. 뭘 세는건가 했더니, 기차가 터널을 지나면서 깜깜해 질 때마다 그렇게도 신나게 숫자를 세는거다. 


/ 와! 이번엔 더 길었어! 다시 해보자아! 


춘천에서 홀로 돌아오는 서울은 또 어땠나. 아빠 손에 매달려 계단참을 힘겹게 오르면서도 한쪽발은 부지런히 계단과 난간 사이의 그 틈에 쑤셔박기를 멈추지 않는다. 왜 그러나, 하는 것도 없다. 그저 재미있으니까.



여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어릴 때 엄마의 물건을 뒤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뒤지게 맞았다. 뒤지게 맞으면서도 뒤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는데, 작은 갈색 빈 화장품 통에 담긴 엄마의 귀걸이나 - 그러고보니 엄마도 그때는 링 귀고리라는 걸 했구나 - 기념 주화 같은 것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스킨 병을 세차게 흔들어 거품이 왁! 일었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의 고상한 취미 가운데서도 베스트 쓰리 안에 드는 것이었고, 엄마의 립스틱을 몰래 꺼내 발라보고는 뚜껑을 그냥 닫는 바람에 립스틱이 다 뭉개져서 혼쭐이 났던 기억도 선명하다. 아이들이란 이런 것이다. 


내 인생 가장 최초의 기억은 내가 아직 말도 못하고 기어다닐 때다.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로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은 뱃속에 있었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른이 되면서 색이 바래버리기도 하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어땠어?' 하고 물어보면 자세하게 대답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으니까. 


증조 외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와 나머지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은 어느 방. 누군가 나에게 사과를 굴려주어서 나도 사과를 되받아쳐 굴렸더니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웃어주었다. 이번 설에 친척들이 모이면, 사과를 한 번 굴려봐야겠다. '그때는 웃어줬잖아!' 앙탈을 부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