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날씨

계속해서 2월 15일



하루에 걸쳐 천천히 사노 요코 할머니의 <사는게 뭐라고>를 다 읽었다. 스무살 무렵에 그녀의 동화책을 처음 샀는데, 이제는 그녀가 세상에 없고 나는 그녀의 동화책과 죽음 사이의 어떤 시간을 읽고 있다.

책을 읽는동안 창으로 비치는 햇살의 색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정오 무렵에는 블라인드를 반틈만 올려도 온 방이 훤히 눈이 부시더니, 오후 네시경이 되자 책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져서 블라인드를 끝까지 걷어 올렸다. 직장에 나가 하루종일 모니터를 보는 동안은 햇살의 색 같은 것에 신경쓸 틈이 없다. 책의 말미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책장을 덮고나니 나른한 햇살과 함께 졸음이 밀려온다. '지금 행복하니?'라고 스스로 물었고 아마 그렇다는 무언의 끄덕거림과 함께 잠에 빠졌다. 깨어나니 저녁 일곱시 십분전. 일곱시에 볼 일이 있어 황망히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하루를 통째로 날려먹은 기분이었다.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분명히 오히려 매순간 반듯하게 깨어있고, 내가 무얼 하는지 뚜렷이 자각하는 하루였는데 직장 다닐 때와의 생산성과 비교하는 내 모습에 부아가 치민다. 정신놓고 바쁘게 분초를 쪼개며 돈을 버는 삶이, 하루종일 비스켓을 쪼개먹고 책을 읽으며 실실 웃다가 잠드는 하루보다 더 영양가있고 가치있는 삶이라는건가. 도대체 이럴때 달라이 라마는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달라이 라마도 아니고 달라이 라마가 될 자격도,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내 안에서 동시에 피어오르는 죄책감과 여기에 부록으로 딸려오는 화를 어쩌지 못하고 차가운 겨울밤을 달릴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발이 날렸다. 순간 또 짜증이 북 나다가 마음을 고쳐먹는다. 꽃피는 봄이 오면 갑자기 추운 겨울밤과 붕어빵이 그립다고 징징거릴 인성이시니, 차라리 지금 내려줄 때 만끽하심이 어떠하온지요. 내 안의 시어머니에게 읇조린다.

눈 내리는 허공에 아무리 핸드폰을 들이대도 사진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또 그렇게한다. 일순간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허공을 쫙 비추어서 눈발이 얼마나 많이 내리는지 알 수 있었다. 춥다, 춥다, 사무이, 사무이. 오르막을 자박자박 오르면서 나를 좋다고 했던 가까운 고백들을 떠올렸다. 다들 같은 자리에서 차 안에 나를 앉히고는 같은 말을 했는데 내 말도 마음도 같았다. '아 그렇군요.' 라고 했다. 해버렸다,가 맞겠지.

추운 겨울에 누군가의 뜨거운 마음을 전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그 맘이 하찮거나 고맙지 않은 것이 절대 아니다. 중국에서는 고백한다는 말을 '표백한다'고 표현한다. 표백제 할 때의 그 한자를 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면 마음이 빨래한 것처럼 말끔해지는 것일까. 오늘이 2월의 중순이니 아마 조금만 더 지나면 눈송이를 오래도록 볼 수 없겠지. 나를 떠나간 고백들이 눈송이처럼 둥실 떠다니는 2월의 밤이다. 내가 쏘아올린 고백도 앉을 곳을 찾지못해 어딘가를 둥실 떠다니고 있을까. 내 마음은 여전히 찌뿌둥하다. 그리워하지 않을 의지를 내야한다는 게 이상하기만 하다. 내가 중국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표백은 나에게 작동하지 않는다.




'오늘의 날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년 2월 19일  (0) 2016.02.19
2016년 2월 16일 : ㅈㅅㄲ  (1) 2016.02.16
발렌타인  (0) 2016.02.14
2016년 2월 14일 : 꼭 1년전   (2) 2016.02.14
2016년 2월 13일 : 봄비  (0) 2016.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