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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on de alone/어떤 낱말들의 모임

김형경 <오늘의 남자>_ 한 남자한테 세 번 차였는데요!

 

 

 

 

 

 

 

 

겨울이면 늘 이민을 결심한다. 얼어붙겠는 얼굴을 하고서 입을 앙 다물고서 '언젠가는 겨울이 없는 나라에 가버릴꺼야!' 겨울 사이를 헤집으며 부득부득 결심한다. 그리고 이 겨울은 이민가면 영원히 못 누릴 겨울이니 이번만큼은 특별히 온몸으로 누려주마, 호기로운 척을 한다. 내년에도 이민 못 갈꺼면서. 알면서. 김형경 작가의 저서들 중 <남자를 위하여>를 특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최근에 나온 <오늘의 남자>는 사실 전작만큼 깊숙하진 않은 느낌이라 내심 아쉬웠더랬다. 겨울과 남자. 이 둘 중에 무엇을 택할까. 퇴근 후에 잠시 고민하다 또 기필코 이민을 부르짖으며 차가운 밤공기를 비집고 <오늘의 남자> 강연장을 찾았다. 나란 여자, 남자를 택했다. 이 겨울을 무릅쓰고.

 

 

유선과 함께 와서 들었으면 좋았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1. 남자의 무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누군가를, 한명 혹은 두명 세명을 평생 부양해야 한다면요? 먹이고 입히고 교육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어떤 마음이겠어요?"

 

 

늘 책으로만 만났던 작가를 처음 봤다. 어디 못버리는 모범생 성미라 강연장에 일찍 도착해 가장 앞줄에 앉았다. 독자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꾸벅하고 자리에 앉은 작가분이 참 예뻐보였다. 그리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던지는 첫 질문. '평생,부양' 이 두 글자를 듣자마자 가슴이 쿵 하고 순식간에 묵직해지는 느낌. 그렇구나. 아무리 남자에게 안 기댄다고, 나는 남자에게 집 해오라 뭐 해오라 하지 않는 '깨인' 여자라고 자뻑하고 있었거늘 나도 뼛속까지 여자구나. 남자들은 늘 누군가에 대한 '책임', 이토록 무거운 무게를 몸과 마음에 이고 평생을 사는거구나, 싶은 생각에 다시금 아찔해졌다. 

 

 

2. 좋은 남자란?

 

 

"헌신적인 남자와 이기적인 남자 중 어떤 남자를 택해야 할까요?"

 

 

헌신과 사랑. 김형경 작가의 좋은 말들중에 '헌신과 사랑' 이란 키워드가 좋아서 짧게 메모했다. 헌신과 사랑은 다른 개념이라는 말. 헌신은 일방적인 소통행위. 타인에게 지극히 헌신하는 사람은 그 대가를 바라게 되어있다, 는 것이 요지. 역시 알맹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 안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타인에게 사랑을 '갈구'할 수 밖에 없는데, 헌신도 그 갈구의 방식 중 하나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를 사랑해줘, 좋아해줘. 그러니 가장 먼저 자기를 즐겁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타인도 즐겁게 할 줄 아는 것이고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죽일놈의 애정결핍. 당연히 사랑 넘치는 집에 태어나서 듬뿍 사랑받고 자란 다음에, 남한테도 그 사랑 퍼부어 줄 수 있으면 제일 땡큐한 케이스인데 사람 일이 마음대로 안되잖아. 부모 세대, 부모의 부모 세대, 또 부모의 부모의 부모 세대...  다들 애정결핍에 지난하게 시달리다가 자식 세대로 대물림하고, 또 대물림하고. 나는 내 선에서 끊어보겠다고 이를 악문 사람이라서 - 힘들어서 못 살겠으니까! - 적어도 내가 '애정결핍 중증'이었구나, 를 한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는 눈 정도는 생겼는데, 나도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애정결핍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부모가 그들의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이 상처가 되고, 또 그 상처가 대물림되어서 내 마음에 온갖 스크래치를 남기고... 아무튼 뭐 스크래치 타령은 여기까지. 결론은 역시 자기를 먼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헌신적인 남자와 이기적인 남자 중 굳이 고르려면 이기적인 남자를 골라라. 그러나 그 이기심은 서른 다섯살 이전까지만!  (나의 외할아버지는 평생을 더럽게 이기적으로 사신 분이라서, 이기적인 남자와 평생을 함께보내면 여자가 어떤 고초를 겪는지 충분히 보고 자라서 안다.)

 

 

3. 이미 사랑하는데 어떡합니까?

 

 

독자와의 질문 타임. 세 명 정도만 받는다는 말에 할까말까 가만 있다가 그 고귀한 기회를 이상한 질문에 써버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 나도 번쩍 손을 들었다. (이상한 질문의 예 : 이메일 주소를 바꾸셨나요? / 제가 얼마나 멀리서 왔는줄 아세요, 이따가 싸인 받아서 갈껍니다! 등) 이런 자리에서 늘 가만히 쌀자루처럼 곱게 앉아있다가 총총 나가버리는 타입인데, 어제는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저 한 남자한테 세 번이나 차였거든요."  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열살 이전까지 충분한 사랑받고 자란 남자가 좋은 남잔지 알겠고... 그런 남자 만나면 좋겠긴 한데, 충분한 사랑 못 받고 자란 남자를 이미 사랑하는 여자는 어찌해야 되나요? 힘들어 죽을것 같은데요. 저도 처음부터 하자 있는 줄 알면 시작도 안 했을껀데, 어쩌다보니 좋아져가지고..."

 

 

김형경 선생님이 온화하게 웃으면서 나를 보고 끄덕거렸다.

 

 

"세 번이나 버텼으면 잘 버텼네요. 살아남았네요. 그 남자가 테스트 하는거예요.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그냥 계속 보여주세요. 사랑하는 마음을. 그 남자는 한번도 그런 사랑을 안받아봐서 자꾸 도망가려고 하는거예요. 그러니 계속 따뜻하게 사랑해주세요. 그 남자의 닫힌 마음을 녹여주세요."

 

"제가 무슨 마더 데레사도 아니고... 전 이 남자를 계속 사랑하고 사랑하면, 인격자라도 되는건가요?"

 

"제가 보기에 이미 여자분은 인격자네요. 세 번 차여봤으면 네 번째도 잘 견딜 수 있어요."

 

 

 

철벽남 마음, 겨우 녹였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얼어붙었잖아. 이 퀘스트를 다 깨면 뭐가 되나요? 집에 돌아와서 이 질문을 나에게 줄곧 던졌다. 이 퀘스트를 다 깨면, 그러니까 당신의 마음을 다 녹이면 난 뭐가 되는거야? 세계 최고의 용접공이라도 되는거야? 마더 데레사 뺨을 만질 수 있는 인격자 정도는 되는거야? 

 

 

 

 

글을 쓰다가 문득 답이 떠올랐다. 

당신과 사랑할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