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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2015년 7월 25일 : 쿠키

 

 

 

 

 

밤새 비가 왔다. 어찌나 쏟아붓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차분히 물줄기를 그려낼 수 있을 것도 같다. 요란한 빗소리에 귀가 자꾸 움찔거린다. 그 빗소리를 배경음으로 깔고 얕은 꿈을 꾸었다. 쿠키에게 '오늘은 비가 퍼부으니 다음으로 미룹시다' 라고 침대에 누워 뭉기적대며 문자를 보내는 아침을 꿈꿨다. 그리고 어느 오후에는 볼일을 보느라 나도 모르게 쿠키와의 약속을 깜빡잊고 죄송해하며, 이 죄송은 고의가 아니라며 한편으론 짐짓 쾌재를 부르는 장면. 꿈에서는 결코 쿠키를 마주하지 않았다. 꿈은 현실의 반대랬으니 나는 아마 오늘 정오쯤에는 죽상을 감추느라 애를 쓰며 쿠키를 독대하고 있겠지.쩝.

 

 

아주 좋아하는 언니가 문득 소개팅을 시켜주겠다며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물어왔다. 언니의 남자친구의 아는 형인데, 화려하게 잘 생기고 멋지진 않아도 사람이 진득하고 괜찮다고 했다. 아. 소개팅. 만남의 목적과 과정, 결말이 오로지 단 하나의 방향을 향해가는 그런 인위적인 만남의 장은 체질에 맞지 않아 결코 사양이다만 언니가 소개해주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현아. 너처럼 예쁘고 착하고 매력있는 애가 어디있니. 여러 남자를 만나봐. (언니는 나에게 참 일관적으로 호의적이다.)

 

 

언니의 남자친구의 아는 형이 그 뒤로 여러차례 연락이 왔다. 바쁘세요? 오늘도 야근이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저에 대해서 궁금한건 없으세요? 아. 언니의 '화려하게 잘 생기고 멋지진 않아도' 에 주목했어야 했는데. 새삼 나는 은근히 잘 생기고 멋진 남자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어깨!) 물론 대부분의 여자가 그렇겠지만. 얼굴과 매치되지 않는 쿠키라는 닉네임도 버거웠다. 쿠키라니. 쿠커라면 어느정도 이해를 건네볼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학 다닐 때, 아는 오빠가 간호대와 소개팅을 한다며 신나게 들떠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막상 나갔는데 맘에 안들어 면전에서 담배를 빡빡 피고는 밥값을 반띵하고 나왔다는 일화가 유명했다. 예쁘지 않으면 여자도 아니냐며, 오빠는 쓰레기라고 항변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현우가 건네준 사소한 말 한마디나 바나나 우유에는 그토록 온 마음이 활짝 열리면서, 어떻게 겪어보지도 않고 원천봉쇄하느냐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그래 나도 쓰레기가 될래.' 라며 합의점을 도출해냈다. 어거지 미소천사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쓰레기가 나을 것이다.

 

 

몹시 더 바빴으며, 몹시 더 야근을 했고, 몹시 식사를 많이 했다. 네 오늘도 바쁘네요. 네 오늘도 야근이네요. 네 먹었습니다. 칼같이 쳐내면 튕겨나갈 줄 알았으나 쿠키는 꾸준했다. '저를 잊으신건 아니죠?' 쿠키의 꾸준함이 나의 미안함을 자아낸다. 하. 하늘아래 다 똑같은 사람인데 뭐 잘났다고 누구의 성의를 무시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선자인 언니에 대한 미안함도 덩달아 따라온다. 이틀전이었을게다. 밥솥 직거래를 위해 퇴근 후 지하철을 50분이나 타고 비오는 날씨 속을 헤메는데 또 쿠키의 메세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녁식사는 하셨어요?' 에라. 덥석 만나자고 메세지를 보냈다. 내가 남자한테 먼저 만나자고 얘기한건 처음이다. 그래. 그렇게 여자사람이랑 밥 한번 먹고 싶으시면 제가 먹어드릴게요. 토요일인 오늘, 점심에 만나자고 했다. 장소와 시간까지 또박또박 다 찍어서 보냈다. '시간 장소 어떠신가요.' '시간이 없더라도 만들어야죠.' 나는 결혼적령기의 남자-여성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가 시간을 짜내어 여자를 만나는 심정의 절박함을 모른척 하고 싶다. 제발 토요일 오전에 백화점가서 바지는 사지 마세요. 오월 오일, 날짜도 장렬한 얼마전의 소개팅에서는 남자가 돈자랑을 하고 싶었는지 소개팅을 위해 새로산 브랜드 바지와 셔츠를 내내 자랑하다가 보풀이 묻는다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있다.

 

 

만남의 이유와 목적이 뻔한 만남에, 이미 결과까지 정해져 있는거라면 -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정해버린거긴 하지만 - 거기에 시간을 쏟을 필요가 있을까. 옆자리 현진은 '애당초 맘에 들지 않으면 칼같이 잘라버리라' 며 나를 이해못했다. 나도 얼마간은 좋은 사람이 되고싶은 거겠지. 언니에게 미안하지 않으면서 쿠키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고 싶은 알량한 욕구. 여전히 예쁘고 착하고 매력있는 사람이고 싶으니까.

 

 

얼마전, 밤에 술한잔 하자는 누군가의 제안을 거절했더니 '너가 그러니까 연애를 못하지'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신에게 여지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는데. 난 너와 연애하고 싶지 않거든. 연애하고 싶은 사람한테는 내가 얼마나 살갑고 다정하고 따스하게 구는지 당신은 절대로 영원히 모를텐데. 내가 오늘 쿠키에게 잔인하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잔인하다는게 아예 마음의 싹을 몽땅 잘라버릴만큼 못되고 쌀쌀맞게 구는 것인지, 적당히 웃고 말을 받아주고 하하호호 웃은 뒤에 '어머 제 스타일은 아니예요' 라고 다마를 까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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